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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 프롤로그

2020. 5. 8.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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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혜성처럼 전진하는 우리는 신화입니다! "

 

그룹명

SHINHWA
신화

멤버

에릭

( 문정혁 [文晸赫] / 79 / 서울특별시 강남구 / B )

 

이민우

( 李珉雨 / 79 / 전라북도 남원시 인월면 / A )

 

김동완

( 金烔完 / 79 / 서울특별시 강남구 / O )

 

신혜성

( 정필교 [鄭弼教] / 79 / 서울특별시 강북구 / A )

 

전진

( 박충재 [朴忠裁] / 80 / 서울특별시 강동구 / B )

 

앤디

( 이선호 [李先鎬] / 81 /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 O )

데뷔

1998년 5월 9일

정규 앨범 <해결사>

활동기간 1998년 3월 24일 ~ 현재
소속사

SM엔터테인먼트 (1998년 ~ 2003년)
GOOD EMG (2003년 ~ 2011년)

신화컴퍼니 (2011년 ~ 현재)

공식색 주황색
팬덤 신화창조

 


 

1998년 3월 24일에 SM엔터테인먼트 소속으로 데뷔한 대한민국의 6인조 보이그룹이다.

그룹명은 신화(Mythology)에서 유래되었다.

1998년 SM엔터테인먼트에서 데뷔하였고, 2004년 굿엔터테인먼트로 이적하였다가 2011년 본인들이 직접 신화컴퍼니를 설립하였다.

데뷔 이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룹의 해체나 멤버의 탈퇴 및 교체가 없었던 국내 최장수 아이돌 그룹.

2017년 기준으로 13장의 정규앨범과 7장의 비정규앨범을 발표하여 대한민국 댄스 그룹 최다 정규앨범 발매 기록을 수립하였다.

1999년부터 인기를 모으기 시작했고, 최전성기로 간주되는 기간은 2001년부터 2005년까지이다.

1990년대 후반에 전성기를 맞았던 H.O.T.와 젝스키스는 1세대 선발주자로, 2000년대 초반에 전성기를 맞았던 신화와 god는 1세대 후발주자로 구분된다.

H.O.T.의 영향으로 신비주의 미소년이 주류이던 1대 아이돌 붐 시장에서 신화는 유일하게 강한 남성미, 탈신비주의, 화려한 댄스 음악 등을 내세우며 차별화에 성공하였다.

1세대 아이돌 그룹의 수명은 3 ~ 5년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신화는 2004년 데뷔 7년차에 가요대상을 수상하며 최전성기를 맞았으며, 지난 20년 동안 1집을 제외한 15개의 모든 활동곡이 음악방송에서 1위를 거두었다.

또한 서울올림픽주경기장에서 단독 콘서트를 열 수 있었던 몇 안되는 국내 가수이며, 첫 단독 콘서트, 10주년 기념 콘서트, 20주년 기념 콘서트를 모두 올림픽체조경기장에서 치렀다.

'따로 또 같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돌 개인 활동의 보편화를 이끈 그룹이다.

그룹 활동과 개인 활동을 병행한 최초의 아이돌 그룹이자 개인활동으로 대박을 친 몇 안되는 아이돌 그룹.

아이돌 그룹 멤버의 개인 활동이 용인되지 않던 시절 일찍이 멤버 개개인이 솔로 음반, 예능, 드라마, 광고 등 다양한 연예 분야에 도전해 성공을 거두었고, 2000년대 중반에는 방송만 틀면 신화 멤버가 나온다는 소리를 들었을 정도로 왕성한 미디어 활동을 보였다.

트렌드에 절대 뒤쳐지지 않으면서도 신화만의 음악적 색깔을 잃지 않는 것이 강점.

신화를 대표하는 장르는 화려한 사운드의 댄스 음악으로, 댄스를 유독 부각했던 1세대 아이돌 그룹 중에서도 퍼포먼스로 가장 유명하다.

퍼포먼스 측면에서 높은 완성도와 이색적인 시도로 좋은 평가를 받아왔을 뿐만 아니라, 댄스 음악을 하는 그룹도 장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모범적인 사례이다.

 

장수

2020년 기준으로 데뷔 22 주년을 맞은 국내 최장수 아이돌 그룹이다.

게다가 데뷔 이후 한 번도 해체나 멤버의 탈퇴 및 교체 없이 끈끈한 의리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더더욱 주목받고 있다. 아이돌계의 살아있는 전설.

신화가 데뷔했을 당시 1990년대 후반은 아이돌의 평균 수명이 3~5년에 지나지 않았고 덕분에 5년차 징크스라는 말까지 있었다.

때문에 SM엔터테인먼트 역시 신화를 해체시킨 후 솔로로 계약할 생각이었으나, 신화는 함께 일하던 스텝들을 데리고 다 같이 소속사를 이적하며 그룹을 보존했다.

2000년대 초중반 당시는 매너리즘과 불법 음원 범람, 그리고 소몰이창법 발라드 위주로의 가요계 개편으로 인해 1세대 아이돌들이 지독한 침체기를 겪던 시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신화는 아이돌계의 징크스를 깨고 2004년 7집으로 대상을 수상하며 데뷔 7년차에 제 2의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7년차에 전성기를 맞기는 커녕 7년차인 아이돌 그룹 자체가 극히 드물었다는걸 생각하면 대단한 일.

신화가 데뷔했을 당시는 아이돌 평균 수명이 짧았기 때문에 신화는 10년도 더 전부터 '장수 아이돌', '중견 아이돌'이라는 타이틀을 달게 되었다. 아이돌계 최고참으로 활동한 기간이 아닌 기간보다 더 많은 셈.

한국 아이돌 최초 정규 6집 활동이라는 타이틀이 붙었던 <너의 결혼식> 활동 시절, 신화는 당시 평균나이가 고작 24.5세에 불과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나이 때문에 춤출 때 힘들지 않느냐?"라는 질문을 받았다.

그 정도로 이 당시 아이돌이란 20대 초반 이하의 어린 친구들이 몇 년 바짝 하고 빠지는 직업이었고 20대 중반도 거의 찾기 힘들었다. 서른이 넘은 현역 아이돌들도 많은 지금으로써는 상상하기 힘든 일.

그렇기에 신화는 더더욱 연예계에서 변종으로 여겨졌고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군복무로 인한 공백기 4년을 제외하면 그룹 활동을 2년 이상 쉬었던 적이 단 한번도 없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실. 평균 앨범 발매 텀은 대략 1년 반 정도다.

한창 빡세게 활동하던 1~6집 시기에는 1년에 한장 꼴로 앨범을 발매했고, SM엔터테인먼트를 나온 이후 7집부터는 그룹활동과 개인활동을 병행하며 앨범 발매의 텀이 길어졌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백기가 2년 이상을 넘어간 적이 단 한번도 없다.

심지어 활동이 뜸하다고 원성이 자자했던 시기인 2005년~2008년 조차도 8집은 1년 9개월, 9집은 1년 10개월만에 발매되었기 때문에 평소와 비교해 그다지 긴 텀도 아니었다.

최근 아이돌 그룹들과 가요계의 동향을 보았을 때 굉장히 이례적인 사례로, 데뷔 20년차 베테랑인 신화가 싱글도 미니앨범도 아닌 정규앨범을 1~2년마다 꼬박꼬박 발매한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행보라고 볼 수 있다.

그만큼 멤버들 모두 무조건 개인 활동보다 그룹 활동을 무조건 우선시한다.

활동부터 음반 제작까지 멤버들이 최종적으로 책임을 지다보니 준비 기간이 길고, 이 때문에 정규 앨범 활동 최소 1년 전에 멤버들끼리 모여 플랜을 짜놓는다.

그룹 활동을 우선하여 플랜을 짠 후 남는 시간에 개인활동 플랜을 짠다고 한다.

배우 활동을 병행하고 있는 에릭과 김동완의 경우 신화 활동에 조금이라도 방해가 될 것 같으면 먼저 들어오는 시나리오는 읽어보지도 않는다고 한다.

다만 <연애의 발견> 시나리오가 들어왔을 때는 에릭이 멤버들에게 '~한 시나리오가 들어왔다'라고 말을 꺼내자 멤버들이 오히려 무조건 하라며 계속 등을 떠밀었고 신화 활동을 예정보다 뒤로 미뤘다고 한다.

신화가 얼마나 오랫동안 활동했는지 설명하자면 H.O.T., 젝스키스 다음으로 데뷔하여 god와 동시기에 활동하였고, 동방신기가 막 데뷔해 신인상을 휩쓸때 가요대상을 받았고, 샤이니와 같은 테이블에 앉아서 골든디스크 본상을 수상을 하였고, EXO를 2013년 MAMA에서 투표로 이겼다.

심지어 이제는 1998년 신화가 데뷔했을 당시 태어난 아이들이 아이돌 후배들이 되었다.

게다가 이 친구들이 2017년 기준으로 성인이 된다. 신화가 데뷔할 때 태어난 아이들도 어느덧 성인이 된 것이다.

심지어 이제는 2002년 신화가 5집을 발표한 해에 태어난 지성(NCT), 사무엘(가수), 유선호 등이 현역 아이돌로 데뷔해서 활동 중이다. 이제는 신화 최전성기에 태어난 아이돌 막내가 활동중이다.

또한 신화가 활동한 시기에만 5개의 정권이 들어섰다. 활동 중 2번째 정권을 맞이하기도 전에 해체하거나, 2번째 정권을 맞이해도 얼마 지나지 않아 해체하는 아이돌 그룹들이 많이 있다는걸 생각하면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순서대로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1998~2003) → 노무현 전 대통령의 참여정부(2003~2008) → 이명박 전 대통령의 이명박 정부(2008~2013) → 박근혜 전 대통령의 박근혜 정부(2013~2017) 이다. 그리고 2017년 5월 10일 문재인 후보가 19대 대통령으로 당선됨으로서 신화는 활동 중 5번째 정권을 맞이하게 되었다.

덤으로 북한에서도 김정일에서 김정은으로 정권이 교체되었다.

아이돌룸에서도 이것을 언급하며 이제는 통일을 바라본다는 말까지 나왔다.

 


 

정규 앨범
집수 앨범명 활동곡 발매일
1 해결사 해결사 / 으쌰!으쌰! / 천일유혼 1998년 5월 9일
2 T.O.P(Twinkling of Paradise) T.O.P(Twinkling of Paradise) / YO! (악동보고서) 1999년 4월 15
3 Only One Only One / All Your Dreams / Wedding March (너의 곁에서 II) 2000년 5월 27일
4 Hey, Come On! Hey, Come On! / Wild Eyes 2001년 6월 28일
5 Perfect Man Perfect Man / I Pray 4 U 2002년 3월 29일
6 너의 결혼식(Wedding) 너의 결혼식 / 중독 2002년 12월 27일
7 Brand New Angel / Brand New / 열병 (Crazy) / Oh! /  2gether 4ever 2004년 8월 27일
8 State of the Art Once In A Lifetime / Throw My Fist / You`re My Everything 2006년 5월 11
9 10th Anniversary - RUN RUN 2008년 4월 2일
10 The Return Venus 2012년 3월 23일
11 The Classic This Love 2013년 5월 16일
12 We 표적 / Memory 2015년 2월 26일
13 Unchanging Part 1 - Orange 오렌지 (Orange) 2016년 11월 29일
Unchanging - TOUCH TOUCH 2017년 1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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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RG 엔알지 프롤로그  (0) 2020.05.08

NRG 엔알지 프롤로그

2020. 5. 8.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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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RG 로고
과거 5인조 NRG
현재 3인조 NRG

 

그룹명

NRG
엔알지

(New Radiancy Group)

前 멤버 故 김환성
( 金煥城 / 81~00 / 2000년 6월 15일 사망 )

문성훈
( 文成焄 / 80 / 2005년 10월 탈퇴 )
멤버

이성진

( 李成真 / 77 / 서울특별시 / A )

( 1999년 8월 탈퇴 ~ 2001년 6월 재합류 )

 

천명훈

( 千明勛 / 78 / 서울특별시 강동구 / O )

( 1999년 8월 탈퇴 ~ 2001년 6월 재합류 )

 

노유민

( 魯維民 / 80 / 서울특별시 종로 / A )

데뷔

1997년 11월 1일

정규 앨범 <New Radiancy Group>

활동기간

1997년 10월 28일 ~ 현재

 

1997년 11월 1일 ~ 2005년 11월 22일

2017년 10월 28일 ~ 현재

소속사 뮤직팩토리
공식색 분홍색
팬덤 千載一遇 (천재일우)

 


 

1997년 10월 28일에 데뷔한 대한민국의 보이그룹이다.

1996년 이성진, 천명훈의 듀오로 데뷔한 '하모하모'에 멤버가 추가되면서 이름 역시 교체된 것이다.

소방차의 멤버 정원관과 김태형이 함께 프로듀싱했다.

NRG의 뜻은 'New Radiancy Group' 즉, '새롭게 빛나는 찬란한 그룹'이다. NoRaGo노라조 아니다. 누룽지도 아니다.

공식 팬클럽의 이름은 '천재일우' 이고, 상징색은 분홍색, NRG가 쓰인 길다란 분홍색 풍선과 NRG와 千載一遇가 쓰인 분홍색 우비를 응원 물품으로 사용했다.

 

NRG는 무대에서 활발한 멤버간의 동선 이동, 덤블링, 격한 안무, 미소년의 이미지, 병맛 같은 뮤직비디오 등으로 유명했다.

 

1집 앨범의 <할 수 있어>가 2위를 했고, 2집 앨범의 <사랑 만들기>가 40만장이 팔려 1위 후보를 통보받았으나 NRG가 1위 후보로 올랐을 때 하필 IMF가 터져서 음악방송 순위 제도가 사라지는 바람에 1위를 하지 못했다.

이후로 김환성은 항상 소원을 묻는 인터뷰에서 소원이 음악방송 1위라고 말했다.

게다가 이 시점부터 아이돌 방송 복장 규제가 강화되어 김환성은 종종 가발을 쓰고 무대에 오르곤 했다.

데뷔 초(1 ~ 2집)에는 Hi-NRG 장르를 하는 그룹이라고 활동했지만 실제로는 90년대 일본에서 인기가 있었던 유로비트 장르 음악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유로비트는 하이에너지의 영향을 받은 장르이기는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두 장르는 별개의 장르다.

NRG는 격한 퍼포먼스와 고난이도 춤을 전 멤버가 소화해서 화제가 되었고 이런 격한 퍼포먼스 덕에 중국에서 컬쳐쇼크 급의 큰 인기를 얻었다.

당시 H.O.T.나 젝스키스만큼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특히 이성진의 뛰어난 예능감 덕분에 각종 쇼 오락 프로그램에도 자주 출연했다. 쉽게 비유하자면 H.O.T.와 젝스키스가 1군이라면 NRG는 1.5군인 셈.

 

1999년 8월 말, NRG는 기자회견을 통해 천명훈과 이성진이 탈퇴한다고 발표했다.

기자회견에서 이성진은 "팀 불화가 아닌 명훈이와 저의 자진 탈퇴"라고 진술했고 , 3집은 문성훈, 노유민, 김환성의 3인 체제로 활동하였다.

NRG 비주얼 유닛 사실 데뷔 초부터 소속사에서는 형들보다 어린 멤버들 위주로 푸쉬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NRG의 인기를 끌어올린 건 리더 이성진이었고, 결국 3집 앨범은 두 리더의 부재가 음반 성적의 부진으로까지 이어졌다.

이후 천명훈이 탈퇴의 전말에 관하여 해명했는데, 2집 <사랑만들기>로 활동하던 당시 무대 의상이 땀복이라 멤버들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어서 이성진과 함께 가서 사장님께 의상 교체를 몇 번 요구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고 한다.

이에 화난 천명훈은 그 자리에서 고가의 의상을 찢어버렸고, 소속사 사장은 이를 빌미로 이성진과 천명훈을 강퇴시켰다.

그런데 기자회견에서는 논란을 방지하고자 '자진탈퇴'로 진술했던 것.

이후로 천명훈은 음악 공부를, 이성진은 Mnet 핫라인스쿨에서 VJ로 활동하기도 했다.

탈퇴했다고는 하지만 그 후로도 김환성이 이성진에게 전화를 시도때도 없이 거는 식으로 멤버들끼리는 여전히 가깝게 지냈다.

 

김환성의 사망 이후 탈퇴했던 이성진과 천명훈이 재합류하여 북경에서 추모콘서트(For Antonio)를 열고 약 1년간의 공백기를 가진 뒤, 2001년 6월, 타이틀 곡 <비(悲)>를 내세운 4집으로 음반 활동을 재개한다.

김환성을 기억하는 추모 앨범 형식이었으며 타이틀 곡은 강타가 직접 작사, 작곡했다.

이 때부터 천명훈이 작곡한 곡이 들어가면서 NRG의 전체적인 컨셉이 바뀌기 시작한다.

이후 NRG의 업적은 이성진이 절반 이상을 쌓아 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는 멤버를 잃고 무너져가는 NRG를 다시 살리기 위해 개인 활동을 시작하면서 그간 쌓아온 미소년 이미지를 과감히 버리고 이때부터 '주접쟁이' 이미지를 선보이며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정규 앨범
집수 앨범명 타이틀곡 발매일
1 New Radiancy Group 할 수 있어 1997년 11월 1일
2 Race Messenger 1998년 8월 7일
3 NRG 003 Face 1999년 11월 4일
4 悲 Sorrow 비(悲) 2001년 6월 5일
5 Hit Song Hit Song 2003년 2월 7일
5집 리패키지 New Radiancy Group 05 2003년 8월 14일
6 NR6G 대한건아 만세 2004년 4월 30일
7 One of Five: 따로 또 같이 별책부록 2005년 11월 22일
20주년 기념 20세기 Night 20th 세기 Night (20세기 나이트) 2017년 10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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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 프롤로그  (0) 2020.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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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아걸 로고

 

그룹명 Brown Eyed Girls
브라운 아이드 걸스
멤버 제아
( 김효진 [金孝眞] / 81 / 서울특별시 강남구 / O )


미료
( 조미혜 [趙美慧] / 81 / 전라남도 순천시 / A )


나르샤
( 박효진 [朴孝珍] / 81 / 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동 / A )


가인
( 손가인 [孫佳人] / 87 / 서울특별시 강서구 / B )
데뷔 2006년 3월 2일
정규 앨범 [Your Story]
활동기간 2006년 3월 2일 ~ 현재
소속사 미스틱스토리
(에이팝엔터테인먼트)
팬덤 Everlasting (에버레스팅)

 


 

개요

브라운 아이즈 - 브라운 아이드 소울을 잇는 'Brown Eyes' 시리즈의 세 번째 그룹이다.

쥬얼리의 해체(2014년)로 인해 2020년 기준 사실상 국내 최장수 걸그룹이 되었다.

또한 디바, 베이비복스의 뒤를 이어 세 번째로 가장 많은 정규 앨범을 발표한 걸그룹이기도 하다.

현역 걸그룹 중 유일하게 10년 이상의 기간 동안 멤버 탈퇴/변경/해체가 없는 그룹이기도 하다.

그리고 2020년 현재 대한민국 걸그룹 왕고, 투고, 쓰리고가 모두 이 그룹에 있다.

 

음악적 평가

아이돌 중에선 상당히 독특한 역사를 갖고 있는데, 원래 아이돌이 아닌 보컬 그룹이었으나, 2008년 초 <L.O.V.E.>를 기해 아이돌로 전환한 케이스다.

멤버들의 솔로 활동 때에도 각기 탱고, 하우스 음악, 미디엄 템포, 성가 형식의 듀엣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소화해 내는 역량을 가지고 있는 팀이다.

특히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 (팀 평균 수준으로서) 걸그룹 가창력 원탑이다.

사실 굳이 가창력을 따지기도 뭐한게 애초에 빅 마마 같은 느낌의 보컬 화음 그룹으로 데뷔한 팀이다.

당장 제아만 봐도 대학 동기였던 이영현과 듀엣을 불러도 부족함이 없는 실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2집 《떠나라 미스김》 때까지는 브아걸의 주요 음악 장르를 소울과 힙합이 융화된 '하이브리드 소울'이라고 소개하고 있었으나, 3집 《Sound-G》부터는 일렉트로니카 뮤지션들이 작곡에 대거 참여하며 일렉트로니카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음악을 구사하고 있다.

 

4집 《Sixth Sense》에 와서는 다시 '하이브리드 소울' 이라는 콘셉트를 언급하고는 있으나, 2집 때처럼 음악 장르로서의 '소울' 이 아니라 영혼이라는 문자 그대로의 뜻에 더 가깝다.

4집의 앨범 사진만 봐도 알겠지만 적어도 4집에 소울 곡은 없다.

그리고 4집은 앨범 전체를 관통하는 장르를 정하기는 조금 어려운 앨범이 되어 버렸다.

'하이브리드 소울'을 표방한 만큼 라틴, 재즈, 하우스, 발라드, 힙합 등 이래저래 잡다한 장르가 뒤섞인 앨범.

이후 앨범들부터는 좀더 실험적인 음악을 하고 있다.

앨범이 거듭되면서 점점 초기의 색깔을 잃고 상업적으로 변모해 간다는 비판도 듣고 있지만, 소울이나 R&B는 외면받고 댄스곡은 확실하다 못해 압도적인 성적을 보여주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흐름이다.

같은 시기 활동한 R&B 그룹들의 현 상황을 보면 브아걸의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할 수는 없을 듯하다.

다만 단순히 댄스곡으로 선회했다고 해서 상업적이라고 욕하는 비판은 옳지 않다.

오히려 음악적인 평가에서는 이전보다 훨씬 풍성해지고 수준 높아졌다는 말을 많이 듣고 있다.

사실 <Abracadabra>가 여러 연예인들이 우스꽝스럽게 패러디하고 희화화 돼서 그렇지 곡 자체는 굉장히 잘빠진 일렉트로닉 팝이라는 칭찬을 많이 받았다.

심지어 브아걸을 지금의 위치에 올려준 앨범 《Sound-G》는 한국의 그래미로 통하는 한국대중음악상에서 그해 최고의 일렉트로니카 송 부분을 시상받기도 하였다.

춤 실력도 춤을 전혀 추지 않았던 그룹이었던 만큼 춤을 잘 추는 이미지가 없었지만 2009년 이후로 수준 높은 퍼포먼스와 함께 가끔 군무가 안 맞긴 해도 춤 실력도 늘어났다.

오히려 과거의 천편일률적인 소몰이 붐에 편승한 채 활동했다면 여타 그룹들과 마찬가지로 노래 몇 개만 알린 그룹으로 조용히 사라졌을 수도 있다.

멤버들 역시 나름대로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이 원하는 음악들을 선보이며 꾸준히 음악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가인은 솔로 활동을 꾸준히 성공시킨 덕분에 이제는 여성 솔로 가수들 중 하나로 근사하게 자리매김 하였고, 미료 역시 자신의 장기를 살려 쇼미더머니의 심사위원도 맡거나 언프리티 랩스타 3에 참가하는 등 나름대로 자신들의 영역을 넓히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데뷔 10년이 넘은 지금 시점에서는 결과적으로 이런 선택이 그룹의 생명력을 지속시키고 음악적인 폭을 넓혀준 셈이다.

 

결성 과정

흔히 제아더러 "브아걸의 창조주"라고 하는데, 이는 사실이다. 동아방송예술대학 영상음악과를 다니고 있던 제아가 현재 브아걸 멤버들 중 첫 번째로 내가 네트워크의 연습생으로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가수  영지의 추천으로 알게된 미료의 수준급 래핑이 탐이 났고 그것은 내가 네트워크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미료 허니 패밀리의 객원 래퍼로 데뷔했었는데 뜨지는 못했지만 몇몇 매니아들이 '저 여자 래퍼 누구지?' 하는 궁금증을 가질 정도로 개성 있으면서도 뛰어난 래핑을 보여줬다. 이에 제아는 앨범을 내주겠다는 말로 미료를 낚아 (...) 내가 네트워크에 들어오게 한다. 미료의 브아걸 합류 시점은 정확하지 않지만 여러 발언들로 추정해 보면 소속사에 들어간 지 약 4년 후에 데뷔한 것으로 보인다. 즉, 2002년 즈음에 내가넷에 들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보컬 한 명, 래퍼 한 명이라는 조합은 불안하기 그지 없었고 철이와 미애도 아니고 아무리 제아의 보컬 역량이 뛰어나다지만 당시 빅마마, 버블 시스터즈, 씨야 등 대세를 이루던 것은 여성 솔로보다는 다양한 색깔을 가진 여성 보컬 그룹들이 만들어 내는 하모니였다. 이에 내가 네트워크는 제아와는 다른 색깔을 가진 보컬을 찾아나선다. 이때 제아는 대학교에 입학하기 전 실용 음악 학원에서 만났던 나르샤를 기억해 낸다. 이름이 같아서 서로 기억한 것도 있고 무엇보다 나르샤의 미성이 강하게 기억에 남았던 제아는 미니홈피를 통해 나르샤에게 연락을 취한다.

제아가 연락하기 전까지 나르샤의 상황은 그다지 좋지 않았는데, 어려운 가정 형편에 가수의 꿈을 포기하지 못해 들어갔던 소속사는 망해버려서 솔로 데뷔를 힘겹게 준비하다가 모든 작업이 다 날아간 판이었다. 특히 나르샤는 경제적으로 안 좋았기에 여러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고 제아한테 연락을 받았을 때도 옷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그 상황에 제아가 오디션 연락을 하니 나르샤는 정말 뛸 듯이 기뻤다고 한다. 그리고 오디션 합격 통보를 받자 믿을 수가 없어서 몇 번이고 제아에게 정말 합격이 맞냐고 되물었다고 한다. 그리고 제아는 합격 맞다고 제발 그만 좀 물어보라고 화냈다고

마지막 멤버인 가인은 제2의 신화를 발굴한다는 명목 아래 진행되었던 공개 오디션 프로그램인 배틀신화를 통해 발굴했다. 정확히는 1회 오디션에서 낙방한 뒤 성질이 나 화장실에서 대걸레를 패던 것을 내가 네트워크의 안정훈이 발견해서 오디션을 보게 했다. 아니 그런데 가인은 여자 화장실에 있었을 텐데 안정훈은 어떻게... 처음에는 데모 테이프를 보내게 했고 데모 테이프가 합격점을 받아 브라운 아이드 걸스 멤버들과 다른 작곡가들이 가인의 오디션을 직접 진행했다고 한다. 그런데 가인의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만 듣고 큰 체구의 여성을 연상했던 사람들은 작은 체구의 여고생이 들어오자 경악했다고 한다.

여하튼 이렇게 멤버를 확정한 브라운 아이드 걸스의 테스팅을 위해 만들어진 팀이 "크레센도"였다. 크레센도는 주로 홍대 클럽들을 돌아다니며 공연을 했는데, 네 명이 모인 상태에서 시작한 게 아니라 나르샤와 제아가 먼저 듀엣으로 공연을 시작하고, 그 뒤 미료가 합류한 뒤 마지막에 가인이 합류했다. 간혹 이 과정 때문에 브라운 아이드 걸스가 원래 홍대에서 활동하던 인디 그룹이며 나르샤 제아가 시작한 그룹이라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이 아니며 브라운 아이드 걸스는 철저히 기획된 팀이다. 인디 그룹이 아니라는 사실은 소속사에서도 강조를 했으며 천 번이 넘는 테스팅을 거친 팀이라고 했을 뿐이다.

 

2021년 - 15주년

활동하는 걸그룹 중 최초로 데뷔 15주년을 맞이하였다. 2021년 현재 나르샤와 제아는 개인활동을 왕성하게 하고 있으며, 미료와 가인은 감감무소식이였다가 15주년 기념 편지로 팬들에게 안부를 전했다. 

 

여담
  • 미료를 제외한 멤버 전원이 서울특별시 출신이다. 서울 출신인 3명도 전부 한강 이남 출신이다.
  • 성형으로 유명하다. 멤버들 성형은 전체적으로 2집 때 완료되었다. 이후에 조금씩 손본 것은 있지만, 의느님의 기적으로 불리는 나르샤의 경우 1집과 2집 과도기에 대부분 성형이 끝났다. 성형이 화제가 되어 인터넷에서 쉽게 1기, 2기, 3기로의 발전상을 찾아볼 수 있다. 위에 말했다시피 사실 초창기의 브라운 아이드 걸스는 지금처럼 TV와 예능에 자주 나오며 홍보하는 그룹은 아니었다. 이전 공연들의 동영상을 보면, 외모는 지금보다 조금 촌스럽지만 멤버가 바뀐 것이 아니다 2006년 무대같은 경우 브아걸의 포스를 제대로 느낄 수 있다. 데뷔 초기에는 소속사의 강력한 의지로(...) 일찌감치 외모로 승부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고 외모도 일부러 안 꾸미고, 가능한 방송에 얼굴을 덜 보이고 노래 관련으로만 활동을 하는 등 얼굴 없는 가수의 콘셉트로 활동하였었다. 후일 연예가 중계에서 나눈 인터뷰 중 가인은 사기 당한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여담으로 개그 콘서트에 왕비호 만나러 두 번이나 출연했는데, 그때 왕비호가 "어유 많이 바뀌었네" 라고 말했다. 심지어는 멤버들의 얼굴이 앨범을 낼 때마다 계속 변화무쌍하게 바뀌어 기수를 뽑아 그룹 활동을 하는 말이 아니냐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본인들은 이제 그걸 갖고 자학 개그를 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성형 전 1기, 조금 했을 때 2기, 그리고 지금은 5기라나... 성형 사실을 두고 찧고 까부는 세간의 작태에 대해서는 SNL에 출연해 매우 쿨하게 깠다. 참고.
  • 히트곡은 항상 이민수 작곡가, 김이나 작사가 콤비와 함께한다는 징크스 아닌 징크스가 있다. 다만 '어쩌다'가 용감한 형제와 작업한 곡이긴 하다. 하지만 여기서도 작사는 김이나 작사가였다. 이 두 사람 역시 브아걸에 가지고 있는 애정은 대단한 듯.
  • 사실 앞으로의 행보에 대해 가장 고민하게 되는 그룹이고, 팬들도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으로 앞으로의 행보를 지켜보고 있다. 사실 이 그룹이 아이돌 취급 받는다는 것은 빅 마마가 아이돌로 변신한 것과 마찬가지다. 원래 그룹 자체가 빅 마마의 영향을 받았던 만큼 지금의 노선 변경은 올드 팬들에게는 참 이래저래 착잡한 상황. 특히 아이돌 그룹의 생명줄은 결국 무슨 병크짓을 하든 앨범을 사주는 충성도 높은 팬들이다. 하지만 브아걸의 경우는 이 팬덤의 크기 자체가 너무 작다. Abracadabra는 노래와 콘셉트가 워낙 훌륭했기에 대박을 쳤지만 이런 대박이 앞으로도 날 거라고 기대하는 것은 무리. 그렇기 때문에 올드 팬들은 저기 이제 그만 하면 됐으니 다시 보컬 그룹으로 돌아와서 우리끼리 오순도순 잘 살아봐요라 말하고 싶지만 한 번 먹힌 걸 포기하고 해 봤더니 안 되는 걸 다시 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무리라는 것을 잘 알기에 팬들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거기에 새로 영입된 팬들은 아이돌 팬클럽의 성격을 띠고 있기에 계속 이런 모습을 보여주길 원하고 있다. 진정으로 진퇴양난.
  • 예전 소속사인 내가 네트워크 아이유의 소속사인 로엔 엔터테인먼트와 사실상 합병하면서, 아이유와는 한솥밥을 먹게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아이유의 팬들도 브아걸의 팬들도 환영하는 분위기인데 사실 브아걸의 팬들 중 일부는 불만을 가지기도 한다. 현재 브아걸이 부족한 것은 소속사의 파워가 부족해 별로 받쳐 주지 못하는 홍보와 언플, 그리고 실력 행사 인데 아이유의 성장 과정을 보면 로엔 엔터테인먼트가 이 분야에서 딱히 내가 네트워크보다 나은 게 없어 보이기에 불만을 가진다. 하지만 이미 합병은 벌어진 일이고, 자본력을 확보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니 돈도 없던 옛날보다는 나은 언플과 홍보를 보여주길 팬들은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가인이 Apop엔터테인먼트로 이적하면서 팀에 균열이 생길 것으로 우려되었으나, 다행히 남은 멤버들도 같이 이적하면서 우려를 불식시켰다.
  • 소녀시대 카라에 가려져서 그렇지 브아걸 역시 K-POP 붐 날조설 추적이라는 불쏘시개 혐한 만화에 등장했다. 그 만화에서 작가는 브아걸의 소속사인 D사가 일본의 재계 인사, 관료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주장한다. 아마도 D사는 내가 네트워크인 듯한데 그저 웃길 뿐이다.
  • 브아걸이 옛날부터 여러 예능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나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많은 MC들과 프로그램을 하게 되었는데, 이 중 브아걸 팬들이 싫어하는 MC는 이창명 신동엽. 이창명이 진행하는 출발 드림팀 2기에서 가인이 팔을 다쳤으며, 신동엽의 경우는 달콤한 밤에 브아걸이 출연한 적이 있는데... 취급이 정말 안습이었다. 바로 전 회에서의 소녀시대에 대한 대우와 정말 심하다 싶을 정도로 대우가 달랐다. 소녀시대가 대세인 점은 브아걸 팬들도 인정하는 바였지만 그날 브아걸에 대한 대우는 그야말로 소녀시대 방송 나가고 남은 시간 때우는 자투리 정도였다. 같이 출연한 김종국이 개그도 다 가로채서 김종국 역시 욕을 먹었다. 그래서 브아걸 팬들은 달콤한 밤이 망했을 때 축제를 벌였으며, 출발 드림팀 역시 때를 기다리고 있다. 2016년, 출발 드림팀이 종영했지만 그 사이에 팬덤이 물갈이 되어 별 반응은 없었다.
  • 일본에서 This Is My Style이라는 제목의 DVD를 발매하였다. 1시간 분량의 영상과 100페이지 정도의 사진집이 내용물이나, 일본에서만 발매하였기 때문에 가격이 좀 비싸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이런 거 왜 발매 안 하느냐는 아쉬움이 자자하다.
나르샤 미료 제아
  • 가인을 제외한 모든 멤버가 맥심 화보를 찍었다.
  • 원더걸스와 악연 아닌 악연이 있는데, 원더걸스의 Tell Me 때문에 정규 2집 《떠나라 미스김》을 아예 말아먹었고 1년 뒤 "L.O.V.E"로 다시 재기에 성공하여 "어쩌다"로 재미를 보려는 찰나에 Nobody 때문에 8주 연속 2위라는 대기록을 수립하게 되었다.
  • Sixth Sense》 후반부에 질러주는 고음 덕분에 "머라이어 캐리 수준의 하이 노트 구사, 충격!"과 같이 오버하는 기사가 많이 나오고 있는데, '하이 노트'란 그냥 직역하면 '높은 음(...)'이란 뜻의 관용적인 표현이고 휘슬 레지스터(Whistle Register)가 정확한 명칭이다. 좀 더 자세하게 말하자면 '휘슬 레지스터'란 그 돌고래 소리가 나는 음역대를 나타내는 것. 물론 '하이 노트'가 그 돌고래 소리(...)를 가리키는 관용구이기는 하다. (당최 무슨 소린지 감도 안 오고 궁금하다면 당장 머라이어 캐리의 'Emotions' 를 들어라)
    머라이어 캐리는 전성기에 5옥타브 솔#(G#7)까지 아주 가뿐하게 찍어줬다. 거기에 Emotions를 들어보면 알겠지만 5옥타브 솔(G7)을 한 노래에서도 몇 번씩 올리던 머라이어 캐리와 비교했을 때 브아걸의 경우는 노래 전체에서 단 한 번 등장. 4옥타브 파(F6). 그것도 가인과 나르샤를 보면 알겠지만 조금 힘겹게 올린다.
  • 물론 그렇다고 브아걸의 실력을 까는 거야말로 에러. 머라이어 캐리 그 시대를 풍미한 월드 와이드 디바고 당장 브아걸의 경쟁 상대인 대한민국 걸그룹들 내지는 보컬 그룹들 중 브아걸의 실력을 무시할 만한 그룹이 없다. 그리고 브아걸에서 가장 음역대가 넓은 보컬리스트는 제아인데, 제아는 하이 노트를 부르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제아의 경우는 3옥타브 파(F5)를 매우 빈번하게, 나르샤도 2~3번 정도 진성으로 내고 있으며, 진성으로 상위권 메인보컬들도 매우 힘들어하는 3옥타브 라(A5)까지 올렸다... 보통 가요 여자보컬의 노래가 높아 봐야 주로 진성으로 3옥타브 파(F5)인데 이 노래 'Sixth Sense'에서는 곡의 앞부분에 레(D5)가 등장하고 있다. 게다가 상당히 빡센 춤을 추면서 라이브를 한다는 것도 감안해야 한다. 팬들의 입장에선 경이로울 지경. 다만 머라이어 캐리에 필적한다는 소리는 브아걸이나 브아걸 팬 입장에서도 기분이 좋다기보단 부담스럽기만 하다는 이야기.
  • 1위 복이 너무 없다. L.O.V.E 도 높은 순위에 비해 1위는 쥬얼리의 "One more time"에 가로막혀 4번 밖에 하지 못했으며 브아걸보다 팬덤이 더 단단했던 쥬얼리는 10번이 넘게 1위를 했지만 정규 2집을 망치고 갓 앨범을 낸 브아걸은 당연히 팬덤이 작았기에 활동 후반기에는 2위에 만족해야만 했다. 또한 어쩌다는 위에서 서술했듯이 8주간 2위를 차지하며 인기에 비해 1위는 전혀 하지 못했다. 그나마 아브라카다브라로 1위를 차지했지만 역시 카라 2NE1 등 아이돌에 가로막혀 연간 차트 3위를 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10번이 넘게 1위할 성적에 5번으로 활동을 마무리해야 했으며 이후 활동 역시 마찬가지다. 특히 5집은 f(x)의 명반 Pink Tape 활동과 맞물려 1위는 커녕 1위 후보에도 못 들었다. 만약 에프엑스와 붙지 않았었더라면 5집의 음방 활동이 좀 더 길어졌지 않겠느냐는 소리가 간간히 보인다. 6집에 대해서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팬덤이 작아서도 있지만 공백기와 시기를 너무 못 잡아 인지도에 비해 1위는 커녕 2위만 많았다.
  • 2018년 3월 2일 데뷔 12주년을 기념해 리더인 제아가 대표로 넷의 마음을 모두 모아 손편지를 써서 팬카페에 올렸다. #
  • 대중들에게 짙은 섹시 컨셉의 성인돌로 유명하지만 정작 섹시 컨셉을 강조한 것은 아브라카다브라, 식스센스, 킬빌 뿐이다. 하나하나 살펴보면 소몰이가 흥하던 시대에 맞춰 나온 1, 2집, 발랄한 컨셉의 hold the line과 오아시스, 청순하고 밝은 컨셉의 Love와 어쩌다와 My Style, 청순하고 어두운 컨셉의 Sign과 클렌징크림, 강렬한 걸크러시 컨셉의 식스센스, SF 판타지 컨셉의 신세계까지 상당히 다양한 컨셉을 기반으로 활동해왔다.
  • 멤버들 중 단 한 명도 장녀가 아닌 사람이 없다. 자매가 있는 사람도 한 명도 없으며, 오직 무남독녀   남매 중 첫째로만 이루어진 그룹이다.
  • 멤버들 전원이 자신의 고독방에 소속되어있는 보기 드문 걸그룹이다. 미료를 마지막으로 모두 자신의 고독방에 소속되었으며, 다들 부방장 자리 하나씩 차지하고 계신다. 멤버들도 고독방이 신기한지 고독방에 활동 관련해서 스포일러를 미리 해주거나 사진을 찍어서 올려주는 등, 활동을 꽤 하고 있는 편이다.
  • 음원시장에서 선공개라는 개념을 알리게 한 장본인이다. 2008년 어쩌다 선공개곡 You는 멜론 연간차트 52위에 정착하였으며, 2009년 abracadabra 선공개곡 Candy Man은 멜론 연간차트 77위를 기록했다.
  • 멜론 연간차트 2년 연속 TOP3를 기록한 유일한 걸그룹이다.

 


 

정규 앨범
집수 앨범명 활동곡 발매일
1 Your Story Second
다가와서
20063 2
2 떠나라 미스김 너에게 속았다 20079 6
3 Sound-G Abracadabra 2009년 7월 21일
3집 리패키지 Sound-G Sign Sign 200910 29
4 Sixth Sense Sixth Sense 20119 23
4집 리패키지 클렌징크림 클렌징크림 2011년 11월 07일
5 Black Box KILL BILL 2013 7 29
6 Basic 신세계 2015 11 5

 

기타 앨범
구분 앨범명 활동곡 발매일
디지털 싱글 Hold The Line Hold The Line (Feat. 조PD) 2006년 5월 30일
디지털 싱글 내가 여름이다 Vol.01 오아시스 (Feat. 이재훈) 2007년 6월 21일
미니 1집 With L.O.V.E L.O.V.E 2008 1 17
미니 2집 My Style 어쩌다 2008 9 16
디지털 싱글 My Style Hidden Track My Style (Hidden Track) 2008년 10월 30일
디지털 싱글 Brown Eyed Girls The Original 한 여름 밤의 꿈 2012년 7월 17일
리메이크 RE_vive 내가 날 버린 이유
원더우먼
2019 10 28
디지털 싱글 2019년 겨울 첫 눈으로 만든 그댈 2020년 눈으로 다시 만들 순 없겠지만 2019년 겨울 첫 눈으로 만든 그댈 2020년 눈으로 다시 만들 순 없겠지만 2020년 1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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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명

Fly To The Sky

플라이 투 더 스카이

멤버

브라이언

( 주민규 [朱珉奎] / 81 / 미국 뉴저지주 / A )

 

환희

( 황윤석 [黃倫碩] / 82 / 서울특별시 강동구 / B )

데뷔

1999년 12월 14일

정규 1집 <Fly To The Sky>

활동기간 1999년 11월 21일 ~ 현재
소속사

SM엔터테인먼트 (1999년 ~ 2004년)

PFull엔터테인먼트 (2005년 7월 ~ 2009년 2월)

H2미디어

팬덤 Fly High

 


 

남성 2인조 R&B 듀오. 주로 대한민국에서 활동한다. 환희는 한국인이고, 브라이언은 한국계 미국인이다.

그룹 활동을 할 시 환희의 소속사인 H2미디어와 브라이언의 소속사인 iMe KOREA에서 공동으로 관리한다.

 

공식 데뷔일은 1999년 11월 21일. MBC에서 방영한 H.O.T.의 단독쇼였던 Login H.O.T를 통해 데뷔하였다.

SM 출신의 실력파 가수를 논할 때 가장 먼저 언급되는 가수 중 하나.

SM엔터테인먼트와의 계약이 끝나자 2005년 7월경에 피풀(PFull)엔터테인먼트로 소속사를 옮겼다.

8집을 끝으로 각자 다른 소속사에서 솔로 앨범을 내며 현재 활동하였고 2014년 5월에 H2미디어에서 정규 9집을 발표하였다.

그룹명은 SM엔터테인먼트의 높으신 분의 작명이다.

의미는 말 그대로. 브라이언은 이 표현이 외국에서는 '학교 종이 땡땡땡~' 과 같은 수준이라며 만류했다고 한다.

차라리 Fly High를 그룹명으로 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까지 했다고 한다.

Fly High는 결국엔 팬클럽 이름이 되었다. 영어로는 Fly to the Sky라고 쓴다. 축약해서 FTTS라고 쓰기도 한다.

1집에는 유영진이 작곡한 동명의 곡도 있다. 이름이 긴 편이다 보니 줄여서 '플투, 플투스' 라고 부르기도 한다.

가수 본인들은 주로 "플라이"라는 약칭을 부르며, 여성 팬 한정으로 윤민, 디씨 플라이투더스카이갤러리 한정으로 환불이라고 불린다. 중국에서는 그룹명이 비행청소년(飛行靑少年)이 되어 버리다 보니 어감이 다소 괴상해진다.

플라이 투 더 스카이의 대중적 이미지는 '슬픈 사랑 노래를 부르는 발라드 가수' 인데 이는 타이틀 곡 선정과 관련이 깊다.

특히 4집 타이틀 곡 'Missing You' 와 소속사 이적 후에 발매한 6집의 '남자답게' 가 히트했기 때문이다.

사실 다른 수록곡들은 더 밝은 것도 많고 콘서트에서는 댄스 퍼포먼스도 선보인다. 어쨌든 타이틀 대부분은 미디엄 템포 발라드.

2008년 당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선매년 7월 27일을 '플라이 투 더 스카이 데이'로 선포했다.

당시의 월드 투어와 더불어 3집 타이틀 곡 'Sea of love' 의 뮤직비디오를 샌프란시스코에서 촬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별 거 아닌 것처럼 보여도 브라이언은 최근까지 꼬박꼬박 챙기고 있었다. 2011년에도 트위터로 자축했다.

데뷔 10년째가 되는 2009년에 8집을 발매하면서 인터뷰를 통해 플라이 투 더 스카이의 이름으로 내는 마지막 정규 앨범이라고 하였다.

두 멤버 모두 당분간 솔로 활동에 매진하며 그룹 활동은 수 년 후에 프로젝트 형태로 이루어질 계획이라고 했었다.

사실 개별 활동의 이유가 멤버간에 불화가 있어서가 아니냐는 소문이 있었고, 두 사람이 강심장에 출현했을 때 이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요약하자면 두 사람 사이를 오가며 험담을 하던 지인 때문에 오해와 갈등이 있었다고.

실제로 8집 녹음을 따로 했을 정도라고 한다. 그래도 절친노트 촬영을 계기로 관계를 회복하였다고 말했다.

최근에도 두 사람이 같이 찍은 사진을 웹상에 올리는 등 서로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 불화설 때문인지 팀이 해체된 것으로 오해받고 있다. 어쨌든 공식적으로 해체한 것은 아니다.

2014년 5월 20일 정규 9집 앨범 을 발표했다.

타이틀 곡은 '너를너를너를'. 음원 공개와 동시에 주요 음원 차트 1위를 석권하며 '돌아온 R&B 황제'라는 평가를 얻었다.

컴백 기념 콘서트도 예매 시작 3분만에 매진되는 결과를 가져와 식지 않은 플라이 투 더 스카이의 인기를 보여줬다.

 


 

정규 앨범
집수 앨범명 타이틀곡 발매일
1 Fly To The Sky Day By Day 1999년 12월 14일
2 약속 약속 2001년 2월 2일
3 Sea of Love Sea of Love 2002년 4월 26일
4 Missing You Missing You 2003년 7월 7일
5 Gravity 중력 2004년 11월 5일
6 Transition 남자답게 2005년 12월 20일
7 No Limitations My Angel 2007년 7월 4일
8 Decennium 구속 2009년 2월 12일
9 CONTINUUM 너를 너를 너를 2014년 5월 20일
10 Fly High 추억이 돼줘 고마워 2019년 10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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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얼리 프롤로그

2020. 5. 3. 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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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얼리 로고
쥬얼리 1기
쥬얼리 2기
쥬얼리 3기
쥬얼리 4기

 

1기 박정아 이지현 정유진 전은미
2기 서인영 조민아
3기 김은정 하주연
4기 박세미 김예원

 

그룹명 JEWELRY
쥬얼리
멤버 박정아 (1~3기)
( 朴貞雅 / 81 / 경상북도 영천시 / A )


이지현 (1~2기)
( 張佑赫 / 83 / 경기도 고양시 / B )


서인영 (2~3기)
( 徐寅永 / 84 / 서울특별시 송파구 / O )


조민아 (2기)
( 趙敏兒 / 84 / 경상남도 창원시 / B )


하주연 (3~4기)
( - / 86 / 서울특별시 / A )
 
김은정 (3~4기)
( - / 86 / 인천광역시 / B )
 
김예원 (4기)
( 金藝元 / 89 / 경기도 성남시 / O )
 
윤진솔 (4기)
( 박세미 / 90 / 광주광역시 / A )
데뷔 2001년 3월 30일
정규 앨범 [Discovery]
활동기간 2001년 3월 30일 ~ 2015년 1월 7일
소속사 스타제국
공식색 펄 네이비
팬덤 보석상자

 


 

개요

2001년 데뷔해 14년 동안 활동한 대한민국의 걸그룹.

그러나 팬덤보다는 대중적 인기에 치중한 나머지 대표곡을 꼽으라면 'Again', '니가 참 좋아', 'Superstar', 'One More Time' 4곡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대중적 인기는 확실해서 'Superstar'가 1위를 수상한 것을 기점으로 'One More Time' 또한 뮤직뱅크 7주 연속 1위라는 기록을 세우며 대상을 수상하는 저력을 보였다.

'모를까봐서' , 'Love Story' 같은 발라드곡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소속사는 그 악명 높은 스타제국이었다.

놀라울 정도로 기획력이 형편없었음에도 가끔씩 한두 명씩 얻어걸리는 것을 보면 천운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팬덤 관리 능력이 최악인데 데뷔 후 박정아가 탈퇴할 때까지 9년간 단독 콘서트 한 번 없었다.

공식 팬카페와 팬카페가 따로 놀고, 회원수를 합쳐야 만 명이 채 안 되는데 사실 처음부터 이렇지는 않았다.

'Superstar'로 전성기를 구가할 때 팬클럽 '보석상자'는 회원 수가 10만 명에 이르는, 팬덤이 아주 작다고는 할 수 없는 그룹이었다.

하지만 2006년 이지현의 탈퇴로 흔들리더니 운영자가 팬카페를 돈 받고 팔아버렸다.

게다가 조민아마저 탈퇴를 해버리면서 쥬얼리 해체가 기정사실화되면서 팬덤은 사실상 붕괴된다.

거기다 소속사의 방관 정책까지 한 몫 했다.

'One More Time'으로 대박을 쳐놓고 팬덤 관리도 제대로 안 하고 행사나 돌리고 있으니...

 

그룹의 콘셉트

이 그룹을 뭐라 정의하긴 어려운데 쉽게 말해 그냥 대세를 잘 따르는(...) 그런 그룹이었다.

즉, 음악적으로 크게 특색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소속사가 영세하다 보니 대중성을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 그 이유.

즉, 대중성에 영합하는 센스 있는 곡 선정과 컨셉트로 승부하는 그룹이라는 것.

그래도 5집 즈음에는 걸그룹 중에서도 굉장히 안정적인 실력을 보여주기도 했으나 6집에서는 기획력이 이전에 비해 다소 못 미쳤고 그룹 자체가 오래되어 브랜드가 하락하다 보니 그리 좋은 성적을 남기지는 못했다.

박정아와 서인영이 있을 때는 음색 자체가 타 걸그룹에서 찾아보기 힘들다보니 팜므파탈이나 여전사 컨셉을 해도 상대적으로 강렬해보이는 효과가 있던 것은 사실.

어찌되었든 간에 빈약한 팬덤과 멤버들의 낮은 인지도에도 불구하고 앨범을 낼 때마다 어느정도 히트했다는 것은 어느정도 시사할 점이 있음을 보여준다.

충성심 높은 여성 팬덤을 다수 보유할 수 있는 남성그룹과 달리, 라이트한 남성 팬층이 많은 여성 그룹은 대중성이 우선이라는 것.

실제로 2008년 'One More Time'이 대박을 쳤을 때 팬카페 회원수가 3천명이었다. (그 이유는 슈퍼스타가 초대박을 친 후 공백기에 들어갔던 2006년 즈음 10만명 가까이 육박하던 팬카페의 주인이 카페 매매를 했다.)

 


 

3기 이후의 쥬얼리 멤버들

 

정규 앨범
집수 앨범명 타이틀곡 발매일
1 Discovery 이젠 2001년 3월 30일
2 Again02 Again 2002년 7월 31일
3 Beloved 니가 참 좋아 2003년 7월 5일
4 super star Super Star 2005년 3월 15일
5 Kitchi Island One More Time 2008년 2월 20일
6 Sophisticated Vari2ty 2009년 8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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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클 프롤로그

2020. 5. 3.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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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클 로고

 

그룹명 Fin.K.L
핑클

(FinKilling Liberty)
멤버 이효리
( 李孝利 / 79 / 충청북도 청원군 강외면 / A )


옥주현
( 玉珠鉉 / 80 / 서울특별시 강남구 / O )


이진
( 李眞 / 80 / 경기도 수원시 / B )


성유리
( 李在元 / 81 / 독일연방공화국[서독] / O )
데뷔 1998년 5월 20일
정규 앨범 [Blue Rain]
활동기간 1998년 5월 12일 ~ 2005년 1월 10일
소속사 대성기획 (現 DSP미디어)
공식색 펄 레드
팬덤 핑키

 


 

개요

1998년 5월에 대성기획 소속으로 데뷔한 대한민국의 4인조 걸그룹이다.

지금까지도 많은 걸그룹 후손들의 컨셉트와 이미지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그룹이다.

핑클은 청순함, 귀여움, 성숙함으로 어필하며 여러 곡에서 매번 다른 컨셉트를 보여주었다.

이렇게 핑클이 만들어낸 걸그룹 컨셉트의 구도는 지금도 많은 걸그룹들이 시도한다.

그리고 2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S.E.S와 함께 후배 걸그룹들이 롤모델로 삼고있는 그룹이다.

이게 어느 정도냐면 2000년대 중반 이후에 등장했던 2세대 및 그 이후 세대 걸그룹은 말할 것도 없고, 핑클과 S.E.S가 등장한 직후에 등장했던 1세대 걸그룹들마저도 이들을 롤모델로 삼았다는 데 있다.

그만큼 전설(레전드)로 통하고 있다는 것.

또한, 마지막 정식 활동 후 14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신곡 '남아있는 노래처럼'이 각종 음원 사이트 상위권을 차지하는 등 두드러지는 존재감을 자랑하는 그룹이다.

 

정규 4집과 마티즈 2 광고모델 계약 종료 이후 활동도 중단하고 핑클이 지금까지 음반활동이 없어서 해체한 그룹이라고 얘기를 많이 하는데 앞에서 언급했지만 핑클은 공식적으로 아직 해체 안 한 현재 한국 최장수 아이돌 걸그룹이며 또한 멤버 전원이 핑클은 아직 해체 안 했다면서 단호하게 못박고 있다.

그런데 최장수라는 말은 라이벌인 S.E.S.가 재결합하는 바람에 애매해져버렸다.

하지만 각자 소속사도 달라졌고 서로의 활동 범위가 너무나 판이해졌기 때문에 2005년 디지털 싱글 'FIN K.L' 이후 지금까지 후속 앨범이 나올 가능성은 희박해서 사실상 해체 상태나 다름없는 상황이긴 하다.

그래도 2007년 이효리 생일파티와 2008년 성유리 생일파티 때 네 명이 함께 출연하거나 이효리 첫 번째 단독 콘서트 때 이진, 성유리, 옥주현이 깜짝 출연해 넷이 이벤트 무대를 벌인 적은 있다.

성유리는 핑클 얘기가 나오면 되도록 언급을 피했으나, 2008년까지 여전히 핑클 멤버임을 수차례 못박아왔고, 2013년 DSP festival에선 영상으로 "앞으로도 계속 저희 핑클도 많은 관심 부탁한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이진은 특별한 언급을 하지 않았으나, 2009년 이진이 핑클 결합을 원치 않는다는 오보가 난 후 오보라는 사실을 피력하기 위해 팬사이트에 글을 쓴 적도 있다.

특히 이효리, 옥주현의 경우엔 매년 꾸준히 "핑클은 해체하지 않았다"고 말을 해왔다.

과거 소속사인 DSP조차 "현재 소속사가 다를 지라도 굳이 핑클이란 이름으로 넷이 활동하는 것에 대해 제재하지 않겠다"고 했다.

게다가 2004년 3월 DSP 사장 이호연이 특허법인을 통해 핑클 상표를 등록하기 위해 서류를 제출하였으나 2005년 6월 거절당한 기록이 남아있다.

즉, 핑클이라는 이름의 상표권은 DSP에게 없을뿐더러, 그 누구에게도 없다.

그러므로 굳이 앨범이 나오지 않더라도 이런 산발적인 이벤트는 일어날 수도 있다.

사실 핑클의 위력은 각자의 길을 떠난 후에 증명되었다.

많은 아이돌 그룹들이 그룹 해체 후 솔로로 전향할 때 큰 반응을 얻지 못했지만, 핑클의 멤버들은 모두 자신의 새로운 자리를 확고히 잡았고, 연예계에서 자신들의 입지를 계속 다져나갔다.

 

2019년 7월, JTBC 캠핑클럽을 통해 14년 만에 완전체로 예능 활동을 했다. 참고로 단체 예능은 2005년 1월 10일 야심만만 이후 최초다.

 

데뷔 전

대성기획에서 젝스키스 다음으로 야심차게 기획한 아이돌. 본래에는 같은 회사 출신의 중고신인 김준희를 기반으로 그녀가 리더를 맡아 한국의 TLC로 결성하기로 되어있었고 그에 맞춰 훗날 '타샤니'로 데뷔하게 되는 '애니' 등 힙합 삘이 제대로 나는 연습생들이 있었지만, 이후 이호연이 그룹 컨셉을 힙합에서 귀여운 댄스 그룹으로 가기를 원해서 원년 멤버들이 모조리 탈퇴하게 되었다고 한다.

1997년 하반기쯤 합류한 옥주현은 이미 이문세 별이 빛나는 밤에 별밤뽐내기 연장원 출신이었다. 라디오에서 옥주현이 부른 머라이어 캐리의 'Hero'를 들은 대성기획 사장 이호연이 직접 옥주현과 컨택해서 핑클 첫 멤버로 합류시켰다. 옥주현은 성악을 전공하여 대중가수에는 생각이 없었으나 이호연 사장의 설득을 통해 연예계에 발을 딛게 된다. 옥주현이 힐링캠프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당시 이호연은 옥주현을 처음 보고 왜 이렇게 뚱뚱하냐고 돌직구를 던졌으나, 옥주현은 나는 성악하는 사람이니 상관없다고 맞받아쳤다고 한다. 그러자 이호연은 너 아이돌 시켜준다는데 뭐가 싫냐며, 여자는 살빼고 쌍꺼풀 수술 하면 확 바뀐다고 설득했다고 한다. 또한, 젝스키스 콘서트를 공짜로 보여주며 꼬셨다. 그런데 데뷔 날짜가 다가오는데도 수술을 안 시켜주다가 뒤늦게 시켜줘서, 데뷔하고 쌍꺼풀이 부은 채로 활동했다.

그 이후로 옥주현은 핑클 결성에 많은 부분에 영향력을 끼치게 되는데, 이진 역시 옥주현이 캐스팅해 온 멤버다. 이진은 은광여자고등학교 2학년 재학시절 강남 일대에서 유명한 얼짱 물론 당시에는 얼짱이란 단어가 없었다. 당시 사용되던 단어는 킹카&퀸카 이었는데, 옥주현의 친구가 이진과 아는 사이였다. 그래서 옥주현은 직접 은광여고로 찾아가서 단역 연기자 출신인 이진에게 오디션을 볼 것을 요청했고 너! 내 동료가 돼라 에코의 '행복한 나를'을 부른 이진은 핑클의 두 번째 멤버가 되었다.

성유리는 1997년 5월 교내 사생대회에 나갔다가 김동완, 유진, 이효리, 김상혁 등등을 캐스팅한 바 있는 캐스팅디렉터에 의해 발굴되었다. 당시 캐스팅 디렉터는 눈에 띄는 미인이었던 성유리에게 명함을 주면서 젝스키스가 있는 곳이라고 했으나, 성유리는 그 당시 서울대 의예과와 성균관대 의대를 동시에 합격한 친오빠의 영향으로 의사가 꿈이었고 나름 모범생이었기 때문에 가수가 될 생각은 없었다. 그러다 9월에 부모님 몰래 대성기획에 오디션을 보러간다. 당시 옥주현이 성유리의 오디션을 보았고, 이호연은 옥주현의 말을 듣고 핑클 멤버로 합류시켰다. 이때 성유리의 말로는 처음엔 옥주현의 성숙한(...) 외모 때문에 멤버가 아니라 음악 선생님인 줄 알았다고

남은 한 자리엔 '애니'부터 시작해서 영턱스클럽의 멤버 전현정 및 후에 클레오로 데뷔하는 멤버 채은정  많은 가수 연습생들이 거쳐갔지만 모두 핑클과는 인연이 되지 못했으며, 옥주현, 이진, 성유리 3명은 확실하게 모였지만 소속사 사장의 고집으로 꼭 4인조로 데뷔해야 했고 세 명이 캐스팅 된 이후 긴 시간 동안 네 번째 멤버를 발탁하기 위해서 공을 들였다. 이 모 기획사에서 힙합그룹을 준비하는 중이던 이효리가 마지막으로 그룹의 멤버로 확정되었다. 

이효리는 당시에도 주변 지역에 소문난 유명인이었고, 압구정동 레스토랑에서 알바하던 중 캐스팅 디렉터에 의해 발굴되었다. 힐링캠프에서 이효리가 밝힌 바에 따르면, 어느날 대뜸 '나 이호연이요'라고 전화가 와서 사장을 만났다고 한다. 만나서는 노래나 춤 하나도 안 시켜보고 얼굴만 보고 바로 뽑았다고 한다. 참고로 이효리는 과거 H.O.T. 팬이어서 SM 회사 앞에서 토니안을 기다리다가 SM에 캐스팅되어 연습생을 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이효리가 과거 몸담고 있던 회사에서 이효리를 상대로 부적절한 계약을 하고 있던 점을 파악한 DSP 측이 이효리의 가능성을 높게 판단하여, 쿨하게 위약금을 던져주고 이효리를 데려오면서 핑클의 마지막 멤버가 되었다. 최근 한 방송에서 룰라의 이상민, 샵의 이지혜가 같은 소속사(당시 월드뮤직)에서 연습생으로 있던 것을 기억한다며 말하기도 했다.

이후 PC통신에서 그룹명 공모를 받아 "핑클"로 정했으나 이걸로는 부족했던지 상단과 같은 거창한 짬뽕 단어의 약자를 핑클로 부르자고 했다. 하지만 21세기에는 그룹명 공모 같은 건 안 하는 게 좋다

그렇게 이 4명의 소녀는 핑클로서의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기록
  • 걸그룹 최초로 가요대상을 2회 수상하였다.
  • 걸그룹 최초로 단독 콘서트를 개최하였다.
  • 아이돌 걸그룹 최초로 가요대상을 수상하였다.
  • 1999년 12월 평양에서 개최된 SBS 평화친선 음악회에 참여함으로써 걸그룹 최초로 평양에서 공연을 하게 되었다.
  • 1999년 MBC 10대 가수 가요제에서 '30세 미만의 국민이 뽑은 10대 가수상'과 '30세 이상의 국민이 뽑은 10대 가수상' 두 부문에 모두 올랐다.
  • 2000년 MBC와 한국 갤럽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30세 미만이 뽑은 10대가수’와 ‘30세 이상이 선정한 10대가수’에 조성모와 함께 동시에 선정되었다. #
  • 2000년 4월 MBC 드라마 <이브의 모든것> OST의 메인 테마인 'True Love'를 불렀다. 이로써 핑클은 아이돌 최초로 드라마 OST에 참여하게 되었다.
  • 2000년 9월 남미 가이아나 공화국에서 핑클 우표가 발행되었다. 이러한 스타 우표는 93년 엘비스 프레슬리 우표를 시작으로 마릴린 먼로, 제임스 딘, 마이클 잭슨, 마돈나 등의 우표가 발행되었으나 국내 연예인을 대상으로 우표가 발행된 것은 핑클이 처음이다. 이 우표는 미국과 동남아 지역에서도 판매되었다.
  • 2001년 '당신은 모르실거야'가 지상파 3사 음악프로그램 그랜드슬램을 달성하였다. 5월 13일 SBS '인기가요'를 시작으로 19일 MBC '쇼! 음악중심'의 전신인 '음악캠프'를 거쳐 31일 KBS 2TV '뮤직뱅크'에서 1위에 올랐는데, 이는 2013년에 인피니트가 '맨 인 러브'로 그랜드슬램을 달성하기 전까지 마지막 그랜드슬램 기록이었다. 두 기록의 시기 차이는 무려 12년이다.
  • 2004년 SBS 스타의 전당에 선정되어 SBS 목동 신사옥에 조성된 스타의 거리(Star Street)에 핑클 멤버들의 핸드프린팅이 있다. #
  • 2005년 1월 10일에 멤버 전원이 SBS 야심만만에 출연하여 평균 시청률 24%를 기록하였다.
  • 2005년에 Forever Fin.K.L DVD가 발매되었는데 이는 걸그룹 최초로 제작된 DVD이다.
  • 2017년 7월 빌보드지가 선정한 위대한 역대 걸그룹송 100(100 Greatest Girl Group Songs of All Time)에 3집 수록곡 나우(Now)가 88위로 랭크되었다. # #

 

여담
  • 1세대 아이돌 4대천왕 중 유일하게 범죄자가 없는 그룹이다. 그만큼 멤버 모두가 철저히 자기관리를 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
  • 평균 신장이 상당히 높은 걸그룹이다. 이효리가 164cm로 팀내 최단신이고 나머지 2명은 최소 168~169cm 이상에 최장신 옥주현은 173cm에 달한다. 이는 2020년 현재 활동중인 모든 걸그룹을 다 해도 최상위권에 드는 키이며, 무려 20년 전에 결성된 그룹이라는 걸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장신군단이다. 비슷한 시기에 데뷔해 활동기간도 일부 겹치던 S.E.S.를 보면서 너무 이쁘고 요정같아서 주눅이 들었다가 '괜찮아 우린 떡대가 있잖아!' 하면서 으쌰으쌰했다는 얘기를 본인들 스스로 하기도...그런데 그냥 봐도 커 보이는 옥주현에 나머지 멤버들이 묻히는 감이 있는데 이들은 얼굴이 작고 귀여운 상이라 화면상으로는 커보이지 않는다.
  • 네 멤버 모두 오빠가 한 명씩 있다. 옥주현을 제외한 세 멤버는 모두 막내인 것도 특징. 옥주현은 남동생도 한 명 있는 3남매 중 둘째이며 캠핑클럽에서 아버지 이야기를 할 때 이름과 나이가 공개되었다.
  • 의료계에 종사한 가족들이 유독 많다. 이효리 둘째 언니는 전직 성형외과 간호사, 이진 언니 역시 간호사였고, 성유리 엄마도 독일에서 간호사로 근무하였으며 친오빠는 성균관대학교 의대 1기 졸업생으로 현재 삼성병원에서 의사로 일하고 있다.
  • 이효리의 프로필상 생일은 5월 10일이지만 실제 생일은 3월에 있다고 한다. 3월 며칠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로써 핑클은 멤버 전원의 생일이 3월에 있다.
  • 2000년 KT와 협약을 맺어 핑클의 멤버들이 당시에는 대중적이던 공중전화 카드의 모델으로도 발행이 되었다. 15종의 공중전화 카드가 발행되었다. 2000원 권 1종, 3000원 권 10종, 5000원 권 1종, 10000원 권 3종이 발행이 되었다. 2000원 권 50000장, 10000원 권 각 100000장, 3000원 권 150만 장, 5000원 권 50000장. 16년의 세월이 흐른 2016년에는 생각보다도 구하기 힘든 물건이 되었다.
  • 2001년에 발매된 토니 호크의 프로 스케이터의 국내에 정식 발매된 PC 패키지에서는 핑클 네 명의 모습을 딴 캐릭터로 플레이할 수 있다. 멤버별로 기존 능력치와 스킬이 다르게 설정되어 있고 핑클의 히트곡도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게임 캐릭터의 모습이 실제 멤버들과 그다지 닮지 않았다.#
  • MBC 드라마 <이브의 모든 것>의 메인 주제곡인 'True Love'를 불렀는데 핑클이 부른 걸 모르는 사람이 많다. 트렌디 드라마에 어울리는 명곡.
  • 포맨의 5집 수록곡 'Star'는 성유리의 팬이었던 작사가가 성유리를 생각하며 쓴 노래라고 한다.
  • 핑클도 아는 국군의 주적이라는 불쏘시개 국방홍보만화가 한때 그 괴이함으로 방송을 타 유명해지기도 했다. 정작 핑클 멤버들은 자기들 이름이 이런 만화에 쓰이는지도 몰랐다고 한다.
  • "핑클 효과"라는 말도 돌았는데, 핑클이 예능에 나오면 그 프로그램 시청률이 꽤 상승한다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SBS에서는 심지어 핑클 이름으로 예능을 뽑은 적도 있었는데, 그게 <핑클과 가자가자>였다. 이 프로그램은 평균 시청률이 20%가 나오기도 했다. 또한 단체활동을 종료한지 한참 뒤에 완전체로 출연한 2005년 1월 10일자 <야심만만> 시청률은 평균 24%를 기록하기도 했다.
    사실 이건 핑클 멤버 전원이 예능감이 상당히 좋은데다 서로 케미나 팀워크가 끈끈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일단 센터이자 리더이며 제일 인지도가 높은 이효리부터가 명실상부 예능인 취급 받을 정도로 예능감이 훌륭했고, 이진의 경우 나서서 뭘 하진 않지만 어딘가 허당스러운 모습으로 멤버들에게 장난어린 디스를 받거나 뻣뻣댄스, 할렐루야, 아다지오 등등의 예상치 못한 활약으로 레전드 웃음을 주는 일종의 몰이캐릭터였다. 성유리는 데뷔 초에 카메라를 쳐다보지도 못했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서 언니들을 과감히 디스하며 의외의 예능감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탄생한 본인도 싫어하는 흑역사 훌라후프 옥주현의 경우엔 혼자 나오면 말을 잘 하지만 4명이 동시에 나오면 상대적으로 덜 웃긴 편이었는데 특유의 화통하고 넉살 좋은 성격으로 멤버들의 기행이나 드립을 잘 받아주거나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큰 웃음을 주는 서포트 역할을 주로 수행했다. 아무튼 이들의 예능감이 핑클의 대중적 인기를 더 공고히 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 역시나 이런 여자 아이돌은 예나 지금이나 남자 아이돌의 빠순이에게 공공의 적이었지만, 핑클은 다른 그룹들과 달리 자기들한테 달걀을 투척했던 핑클 안티 팬을 한 명 낚아채서 밴으로 압송, 반강제로 협박(…)을 하여 반성문을 쓰게 하는 등 안티들에 대한 대응 능력이 대단했다.
  • 같은 소속사인 젝스키스의 팬클럽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2000년 젝스키스가 해체되자, 젝스키스의 팬클럽이 젝스키스의 해체는 핑클 탓이라면서 싸잡아 공격했던 적도 있다. 젝스키스가 해체하기 이전에도 젝스키스 팬클럽 회원들의 대부분은 "이호연 오빠들이 번 돈을 저 X들에게만 쓴다."고 주장(혹은 생각)하며 핑클을 싫어했다. 당시 PC 통신에서는 일부 회원이 젝스키스와 핑클이 함께 출연한 지상파 방송에서 핑클 팬클럽의 응원을 방해하려고 계획을 짜던 일이 발각된 적도 있었다. 심지어 핑클을 구타하겠다고 핑클 집에 찾아간 X들도 많았고, 싸인회에 침범해서 이효리와 이진에게 달걀이나 돌멩이를 던지는 일이 다반사였다. 공개 방송이 끝나고 오프라인으로 욕설을 투척하는 일도 많았다. 당시 올라온 글들을 보면 좀 심하다 싶은 것들도 보인다. 오늘날 보면 손 발 오그라드는 수준의 주작 글을 올리며 핑클과 클릭비를 천하의 개쌍놈으로 만들거나#, # 이효리가 이호연 애를 낙태해서 핑클한테 대상줬다는 식의, 오늘날 같으면 바로 고소미 먹을 비방 글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젝스키스의 해체에 관한 자세한 것은 젝스키스 항목 참조 바람. 잘못을 따진다면 DSP에 따져야지 핑클의 잘못으로 탓할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핑클도 계약서 없이 거의 무계약이나 마찬가지인 상태에서 활동했으니 핑클이라고 대우가 마냥 좋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물론 이건 핑클의 잘못은 일절 없다.
  • 핑클 매니저였던 길종화가 멤버 네 명의 호르몬 주기를 다 알고 그에 따라 과격한 야외촬영을 조정해줄 정도로 세심한 언니, 엄마같은 존재였다고 한다. 그래서 핑클 멤버들은 길종화 매니저를 종화 오빠가 아닌 종자 언니라고 불렀고# 길종화 매니저는 이렇게 부르는 것을 싫어했다고 한다.
  • 포트리스2가 국민 게임이던 시절 핑클맵이 나온 적이 있다. 근데 특이하다면 특이한 게 이미 핑클 팬덤까지 거의 와해된 상황에서 그 맵이 나왔다는 것. 대체 무슨 의도야? 이후 비인기 맵을 정리하는 업데이트에서 삭제되었다. 양옆에 3층이 없어 최대 높이가 낮고, 대신 아랫층의 두께가 조금 더 두껍다는 점만 빼면 당시 국민 맵인 스핑크스와 별 다른 점이 없어서 금새 묻혀버렸는데, 삭제된 원인이 여기에 있을 듯. 때문에 랜덤 방이 아니면 정말 보기 힘든 맵이었다. 전체적인 컬러는 분홍색이었다.
  • 2015년 1월 12일 방송된 <힐링캠프>에서 핑클 멤버 전원이 동시에는 아니지만 서로 전화로나마 대화를 했다. 여전히 서로 돈독함을 과시하며 불화설을 일축했다. 대화로 미루어보건데 각자 배우로서, 가수로서 각자의 위치에서 잘 나가는 입장으로서 서로 바쁘다보니 연락이 소홀해지고 불화설이 떠오르니 그에 더 부담스러워져 연락이 더 줄어들어 버렸던 듯하다.
  • 핑클의 불화설은 제3자들에 의해 생성되고 부풀려진 면이 있다. 그리고 동시대에 활동했던 다른 아이돌 그룹들과 달리 완전체로 방송에 출연한적이 없었던 것도 이들의 관계를 의심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사실 제기된 불화의 원인들도 객관적으로 보면 말이 안된다.
  1. 이효리와 이진의 싸움. 이 싸움은 1998년 때의 일이다. 그때 싸운게 진작에 난것도 아니고 10년이 넘어서 불화설의 원인이 되는게 말이 되는가. 이효리 본인도 싸운 후 잘 지냈다고 말했었다.

2. 술 문제. 이효리만 술을 좋아해서 달랐다고 하는데 예능에서 이효리가 말한 시점은 1998년이다. 이때는 다른 셋은 모두 미성년자였다. 이후 옥주현은 이효리랑 같이 술마시고 놀러 다녔다고 했고 성유리는 그정도는 아니지만 같이 술을 오래 마셨다는 일화가 있다. 동생들이 고민상담을 하면 불술을 먹여주고 부침개를 직접 치워주기까지 했다

3. 결혼식 문제. 불화설이 커진 계기인데 이효리의 결혼식때 핑클 멤버들이 참석 안했던 것. 하지만 이 당시 이효리랑 친한 지인들도 대부분 불참이었다. 그리고 이후 이진의 결혼식때 옥주현 외에는 모두 불참했고 성유리는 아예 알리지 않고 결혼했다.

4. 토토가 불참. 불화설의 최고조. 물론 이유는 있었다. 옥주현은 뮤지컬 공연 중이었는데 무한도전 촬영날과 겹쳤다. 성유리는 영화 촬영 중이었기 때문에 본인한테 온 섭외 전화에서 거절했다고 밝혔다.

5. 이효리가 막판에 들어와서 다른 멤버들이 싫어했다는 설. 결성과정을 보면 알겠지만 컨셉을 바꾼 후 항상 4인조로 데뷔를 해야해서 다들 이효리를 기다렸던 상황이었다. <캠핑클럽>에서 밝히길 말도 너무 빨리 놨다고 한다.

사실 흩어진 후 이들의 행보를 보면 문제가 없다는건 알 수 있다. 2011년까지 매년 한번씩은 만남을 이어왔고 같이 모인 사진도 종종 공개 됐다.

따지고 보면 이효리가 떡밥을 던져줘서 생긴 일이긴 하다. 본인 생각으론 그땐 그랬지 의도였겠지만. 핑클팬이면 이효리와 이진이 초반에 싸운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머리끄덩이 사건에 대해 크게 생각 안했지만 잘 모르는 일반인들에겐 오해의 소지가 있었고 하필이면 의심될만한 상황들이 연이어 일어났으니.

  • 핑클이 파리바게트 광고를 위해 파리바게트에서 만든 CD게임에 등장한 적이 있다. 옛날 물건이라지만 퀄리티가 너무 처참하다(...).
  • 핑클을 모델로 한 게임 ‘패스트푸드(게임)' 도 있었다. 가게 이름을 정할 때 'FInKL'로 하면 핑클을 직원으로 채용할 수 있다.
  • 2010년에 개최된 제 1회 서울문화예술대상에서 이효리는 대중음악가수 부문 대상을 옥주현은 뮤지컬배우 부문 대상을 수상하여 한 아이돌 그룹에서 동시에 두명의 대상 수상자가 있는 전무후무한 일이 발생하였다.#
  • 2014년 <무한도전 - 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 특집에서 이효리, 옥주현 등을 찾아가는 장면이 나왔다. 메인 보컬 옥주현이 95점을 받아 일단 핑클의 출연이 확정되었으나...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다.
  • 이호연 사장과 나름 좋은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이호연 사장이 뇌출혈로 쓰러지고 병실에 누워 있을 때, 핑클 4명이 모두 찾아와서 이호연 사장이 좋아하던 노래 "루비"를 불러주며 눈물 지었다고 한다.# 2013년 5월 29일 라디오스타에 이효리가 출연해서 말하길, 사장님과 매우 친분이 두터워서 회사가 어려워 월급이 밀리면 다음에 상황 좋아지면 달라고 쿨하게 넘어갔다고 한다. 이외에도 솔로 1집이 대박난 이후로는 이효리가 예전과 달리 싫은 건 싫다고 하자, 이호연 사장이 이효리한테 '아. 네! 이 사장님'거렸다는 말도 있다. 성유리는 <무릎팍도사>에서 데뷔 때 신인으로서는 받기 어려운 좋은 대우를 받았다고 말하기도 했고, 회사에서 나갈 때도 매우 원만히 나가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옥주현은 2015년 핑클 회동 당시 페이스북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리며 핑클의 성공에 이호연 사장 역할이 컸음을 밝히기도 했다. 
    "오랜만에 옛날 이야기 보따릴 펼쳤더니 재미난 일들이 많긴 하다. 넷은 여러모로 세고 특이했다. 이상하리만큼 운이 좋았다, 우린. 가수가 되고 싶단 큰 꿈도 없이 캐스팅된 아이들. 노래 안 되고 춤도 안 되는데 '연습생 시절'이란 것도 없이 그 상태로 데뷔를 시킨다고… 망할 거라고 확신하며 아무 기대도 겁도 없이 세상에 나왔다. 예상대로 데뷔 곡 '블루레인'은 큰 집중을 받지 못했지만 좌절하지도 않았다. 당연하다고 생각했기에. 우리 사장님은 갑자기 말도 안 되는 곡으로 방향을 바꿔 빛의 속도로 일을 진행했다. 뮤직 비디오를 찍던 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이런 옷을 입고, 이런 유치한 가사를 립싱크하라니. 이걸로 앞으로 방송도 해야 하냐고. -이것봐 나를 한번 쳐다봐. 나 지금 예쁘다고 말해봐-콜미 콜미 콜콜 기 붜 코올 -난 니 거야- 우린 모두 하기 싫은 티를 뚝뚝 묻혀가며 했다. 그런데 이게 그렇게 터질 줄이야…! 그 이후 고공행진. 노래 춤 실력을 키워야 하는데 예능의 절대 강자로 시청률을 제압하던 핑클은 잠자는 시간, 가요 프로그램 출연하는 시간을 제외하곤 예능 촬영에 몰두. 노래 연습은 안녕… 춤은 모두가 따라 출 수 있는 걸로. 오늘 밥 먹으면서 저 위의 내용으로 웃음꽃이 활짝 폈다. 신기하지 않냐며, 잠깐 꿈을 꾸고 깨어난 것 같다며. 갖춰진 것도 없이 운이 억수로 좋았던 건 말이 안 되는 걸 되게끔 옆에서 애써준 사람들의 공이 크다고…FBI에서 훈련 받는 것보다 우리 넷을 케어하는 게 몇 배는 더 고통스러웠을(^__^) 매니저 오빠들. 불도저 이호연 사장님. 오늘 귀 좀 간지러우시겠다. 핑클을 에워싼 숲이 되어준 그대들에게 고맙고 보고 싶고 미안하고… 넷이서 이야기 나누며 많이 그리워했어요. 오겡키데스카."
  • 데뷔 21주년 핑클, 완전체로 캠핑클럽에서 뭉친다. #
  • 이효리, 옥주합(?), 최진(?), 옥유리(?)로 이루어진 4인조 걸그룹이라고 한다. 옥씨가 두 명이나 있는 그룹
  • 영화감독 이병헌이 핑클 헌정 영화를 제작하고 싶다고 밝혔다.#
  • 핑클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효리가 잡고 이끄는 그룹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이효리는 핑클 내 서열 꼴찌다. 서열 1위는 막내인 성유리. 당시 표현만 없었을 뿐 걸그룹 막내온탑의 시작은 이분이다. 기 쎈 걸로는 어디 가서 안 밀리는 이효리, 옥주현과 이들만큼은 아니지만 만만한 성격은 아닌 이진 이 세 사람이 다 성유리 앞에서는 동생 바보다. 캠핑클럽을 보면 언니들이 다 성유리를 이뻐하는 걸 알 수 있다.아직도 18살로 생각하는거 같긴 하지만.
  • <캠핑클럽>에서 활동 중단의 이유가 짧게 나왔는데 당시 미래에 대한 고민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과 달리 핑클이 활동할 당시에 아이돌들은 활동을 오래 하지 않았고 dsp에서의 마지막 활동 시기 핑클 멤버들의 나이를 보면 이효리 27살, 옥주현과 이진 26살, 성유리가 25살로 모든 멤버가 곧 20대 후반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계속 활동하기엔 부담이 있었을 것이다.
  • <이소라의 프로포즈>에 4회 출연하여 당대의 아이돌들 중 최다 출연했다. 이소라의 프로포즈는 오직 라이브만 취급했고 비가수들도 출연했지만 가수에 한해서는 이소라가 엄격했기 때문에 출연하기 어려운 방송이었다.
  • 1세대 아이돌들 중 제일 늦게 다시 뭉쳤기 때문에 제일 오래 걸렸다는 인식이 있는데 각각 기간을 계산해보면
    god -> 11년/9년, 젝스키스 -> 16년, 
    S.E.S ->14년, H.O.T.-> 17년, 핑클 -> 14년 
    보면 알 수 있듯이 다른 그룹들에 비해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하지만 기다린 팬들한테는...
  • 핑클 그룹명의 사용에 제약이 없다. 사실 원소속사에서 이적한 경우 그룹명 사용은 어려운 문제다. 핑클의 경우 2004년 dsp에서 상표권을 등록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이후 아무도 등록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핑클은 고유명사의 취급을 받게 되었고 이젠 아무도 핑클의 상표권을 등록할 수 없다고 한다. 즉 핑클은 이효리, 옥주현, 이진, 성유리의 그룹으로 고유명사가 된 것이다.
  • 사실 이효리는 다른 세명이 찍힌 사진을 보고 합류를 주저했다고 한다. 솔직히 그 사진 진짜 못 찍었다. 그래도 결국 합류하기로 하고 첫만남을 가졌을때 옥주현, 이진, 성유리는 이효리의 외모와 몸매에 놀랐고 성유리는 속으로 '됐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근데 동시에 이효리는 성유리를 보고 안심했다고.
  • 2002년 이후 활동을 중단했다고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는데, 음악방송 활동은 4집 2002년이 마지막이지만 핑클로서 활동은 2005년까지 했다. 2005년 1월 야심만만에 단체로 출연했고 10월에는 디지털 싱글 앨범 <Forever Fin.K.L>을 발매했다.
  • 핑클의 노래를 후배 아이돌들이 리메이크 하거나 커버를 하는데 제일 많이 하는 곡 3개를 꼽으면 <내 남자친구에게>, <Now>, <화이트(White)>다. 
    <내 남자친구에게>는 전형적인 소녀스러움을 어필하는 곡이기 때문에 신인 걸그룹들이 많이 커버한다. 
    <Now>는 정말 많은 후배 걸그룹들이 커버하고 리메이크도 했는데 소녀시대, 원더걸스, 카라, 티아라, 포미닛 등 어지간한 2세대 걸그룹은 다 커버를 했고 게다가 3세대인 트와이스, 마마무도 커버를 했다.
    <화이트(White)>는 겨울하면 떠오르는 명곡으로 후배 가수들이 겨울 시즌에 많이 커버를 한다.
    근데 의외로 제일 성적이 좋았던 <영원한 사랑>은 거의 없다. 추측하자면 옥주현의 파트를 감당 못해서 인 듯.
  • 후배 걸그룹 중에서 소녀시대 와 교류가 많다. 같이 방송 출연도 많이 했고 소녀시대 멤버들이 옥주현의 뮤지컬 공연에 찾아오고 같이 찍은 인증샷도 많다. 사적으로 보면 이효리와 유리, 윤아는 이효리가 제주도 본인의 집으로 부르는 사이다. 유리와 같이 고량주를 밤새 마시고 이후 생긴 잔해물을 이상순이 치웠다는 일화가 있다. 윤아와는 같이 <효리네 민박2>를 촬영했다. 옥주현은 소녀시대의 데뷔 초창기때 멘토 역할을 해주었다. <김승우의 승승장구> 소녀시대편을 보면 확인할 수 있다. 티파니와 서현이 옥주현과 많이 만나는 사이다.
  • 성유리는 다양한 헤어스타일에 심지어 머리에 꽃을 심기도 했다. 본인말로는 이뻐보이는 줄 알았다고. <가면의 시간> 무대 영상을 보면 산다라박을 연상시키는 헤어스타일을 한적이 있었고 산다라박의 원조가 성유리네라는 댓글이 있었다.

 


 

정규 앨범
집수 앨범명 활동곡 발매일
1 Fine Killing Liberty : BLUE RAIN Blue Rain / 내 남자 친구에게 / 루비(淚悲) : 슬픈 눈물 1998년 5월 20일
2 White 영원한 사랑 / 자존심 / Waiting For You 1999년 5월 12일
2.5(비정규) S.P.E.C.I.A.L 나의 왕자님께(To My Prince) / 화이트(White) / 가면의 시간 1999년 11월 24일
3 Now Now / Feel Your Love 2000년 10월 6일
3.5(리메이크) Memories & Melodies 당신은 모르실거야 / 늘 지금처럼 2001년 4월 13일
4 call me in your heart ...can be my soul show you love again 영원(永遠) / Don't Go Away 2002년 3월 8일

 

싱글 앨범
구분 앨범명 곡명 발매일
디지털 싱글 Forever Fin.K.L FINKL 2005년 10월 26일
싱글 앨범 남아있는 노래처럼 남아있는 노래처럼 2019년 9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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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명 S.E.S
에스이에스

Sea.Eugene.Shoo
멤버 바다
( 최성희 [崔成希] / 80 / 전라남도 완도군 완도읍 / AB )


유진
( 김유진 [金楢眞] / 81 / 서울특별시 노원구 / A )



( 유수영 [柳水永] / 81 / 일본 카나가와현 요코하마시 / A )
데뷔 1997년 11월 24일
정규 앨범 [I'm Your Girl]
활동기간 1997년 11월 28일 ~ 2002년 12월 19일


2016년 11월 28일 ~ 2017년 1월 1일
소속사 SM엔터테인먼트
공식색 펄 보라
팬덤 친구 (Friend)

 


 

개요

1997년 11월 28일에 SM엔터테인먼트 소속으로 데뷔한 대한민국의 3인조 걸그룹이다.

1세대 대표 걸그룹 중 하나인 S.E.S.는 이미지뿐만 아니라 음악까지 인정할 수 있는 아이돌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10년대에 이르러도 음악과 컨셉, 이미지 등 많은 부분에 있어 걸그룹 후손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으며, 대중성과 음악성을 동시에 잡은 그룹.

몇 세대의 아이돌을 거치는 동안 대한민국 가요계에 등장한 수많은 걸그룹의 시초에는 S.E.S.가 있었다.

S.E.S.는 미래에 등장한 걸그룹들이 나아가는 방향의 모델이 되었고, 멤버들의 성장과 더불어 음악도 함께 성숙해지는 모습으로 대중들의 기대를 충족시킨 S.E.S.는 대한민국 걸 그룹 시대의 화려한 시작을 알렸다.

 

S.E.S.는 데뷔부터 해체까지 큰 잡음이 없었고, 유진이 '친자매나 다름없다'고 할 만큼 해체 후에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등 여러 면에서 이상적이고 긍정적인 걸그룹의 길을 걸었다.

 

팀 내에서 역할은 바다가 메인보컬, 유진이 비주얼, 슈는 일본담당으로 나뉘어 있었다.

데뷔초부터 각종 언론과 방송에서 멤버 각각의 매력에 맞는 여성상을 부여하여 소개했는데 바다는 귀여움, 유진은 청순함, 슈는 여성스러움을 담당하였다. 이후 2008년에 《불후의 명곡》에 출연해서 다시 한번 밝힌 내용이기도 하다.

 

영원한 가요계의 요정이란 소리를 듣고 있지만, 사실 대놓고 요정 컨셉으로 나간건 2집 뿐이다.

1집은 사랑스러운 여자친구 컨셉이였으며 3집부터는 요정보다는 세련된 도시 여자 이미지가 더 강했다.

하지만 워낙 2집 때의 요정 컨셉이 강렬한 임팩트를 가지고 있었고 또 본인들도 활동 당시 요정이미지에 대한 강박관념에 언제나 시달렸다고 하는데, 이때는 화장실도 마음대로 못 가서 주로 주유소 화장실을 이용하였으며 심지어 유진같은 경우는 탄산음료나 커피조차 마시지 않았다고 한다.

 

활동한 모든 타이틀곡들과 후속곡들이 커버된 걸그룹. 1집에서 5집까지 활동한 모든 타이틀곡들과 후속곡들 모두 TV 무대, 라디오, 각종 오프라인 행사 등에서 노래와 댄스가 커버되었다.

심지어 3집의 팬서비스로 메들리로 활동한 샤랄라와 활동하지 않은 5집 수록곡 달리기도 커버되었다.

대한민국 역대 걸그룹들중에 활동한 모든 타이틀곡들과 후속곡들이 다른 걸그룹들이 커버해서 음악적으로 사랑받은 걸그룹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결성 과정

1996년 이전에도 우리나라 가요에선 여자 가수들이 미약하게나마 있었는데 1993년에는 S.E.S.같은 춤추고 노래하는 아이돌 형태의 최초의 걸그룹이라 할수있는 애플이라는 3인조 걸그룹이 나왔다. 

바로 몇주 후 CF 모델 출신들로 결성한 S.O.S라는 4인조 그룹이 나왔고 같은해에는 처음으로 언론 걸그룹으로 소개된 중앙대학교 연극영학과 4학년생들이 만든 칼라라는 그룹으로 1993년 강변가요제에서 "후회하고 있는거야" 라는 데뷔곡으로 대상을 받았다. 

칼라는 당시 걸그룹이라 불렀지만 지금에 와서 보면 빅마마같은 보컬 그룹이라 할수 있기 때문에 춤추고 노래하는 아이돌 형태의 최초 걸그룹은 애플이 시조새라 할수있다. 대중가요계 걸그룹 선풍여성그룹 가요계 새바람

1994년에는 윤현숙과 이혜영의 2인조 그룹 코코, 1995년에는 3인조 그룹 쎄쎄쎄, 1996년에는 비비 뚜띠라는 2인조 그룹이 등장하여 인기를 끌었지만 오늘날의 걸그룹 컨셉과는 차이가 있었다. 사실, 위의 사례는 걸그룹이나 아이돌 컨셉보다는 듀오라고 봐야 한다.

하지만 그 당시에도 여전히 여자 가수가 히트곡을 내는 건 1년에 두세번 있을까말까한 일이었고, 가요 순위 프로그램에서 1위부터 20위까지 남자 가수들이 싹쓸이했을 정도로 여성 가수라 입지를 굳히기에는 너무나 척박한 환경이었다. 박미경, 강수지, 신효범, 엄정화, 이소라 정도가 명맥을 유지하며 순위에 이름을 올리는 정도였다. 위에서 언급한 1993년 언론에 걸그룹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여성 그룹의 존재 자체는 거의 없었고나왔다고 해도 우정의 무대에 몇 번 출연해서 인기를 잠깐 누리다 사려져갔을 뿐이었다.

당시 여성 그룹, 특히 여성 아이돌 그룹 쪽의 시장은 우리나라 음반 기획자들이나 레코드사들에겐 미지의 땅과도 같았다. 영국의 스파이스 걸스, 일본의 SPEED, 미국의 TLC와 같은 걸그룹들이 수백 수천만장을 팔아치우며 승승장구하는 것을 보며 많은 제작사들이 의욕적으로 여성 그룹을 기획하고 도전했지만, 결과는 모두 실패로 끝났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레이블 반도음반에서 내놓았던 걸그룹 애플(아이돌), 일본식 아이돌을 표방하며 해외 진출까지 시도했던 4인조 S.O.S, 한국의 TLC를 꿈꿨던 에코, 삼성뮤직의 후원아래 홍콩에서 데뷔했던 이뉴, 1998년 2집 야야야 부터 즉 데뷔 1년 후 부터 인기를 얻은 베이비복스 1기까지 많은 그룹들이 데뷔했지만 성과가 만족스러운 걸그룹은 한 팀도 없었다. 남성 팬들의 호주머니를 열게 하기엔, 여성 그룹 시장의 진입 장벽은 너무나 높았다.

당시 현진영 유영진을 발굴하고 H.O.T.를 데뷔시키며 선견지명을 과시했던 SM의 이수만은 여성 아이돌 그룹 시장의 잠재성을 인식하고 1996년 가을 무렵부터 걸그룹 프로젝트를 기획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들은 서두르지 않았다. 앞선 수많은 여성 그룹들의 선례를 보면서, 여학생 팬들이 확보되어있는 남자 그룹들과는 달리 맨몸으로 부딪쳐야 하는 여성 그룹은 조금이라도 어설프게 보여서는 씨도 안 먹힐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여성 댄스 그룹을 기획하면서 2년동안 자그마치 1만명이 어떤 잡지에선 무려 3만명 넘는 소녀들을 오디션했다는 사실이 SM의 신중했던 준비과정을 말해준다. 오랜 오디션 끝에,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3명의 소녀들이 선발되었다. 안양예술고등학교에서 연극영화를 전공한 최성희, 괌 교포 출신의 김유진, 일본 가나가와현에서 태어난 재일교포 유수영. 가창력은 다소 부족했지만 외모, 춤실력은 좋았던 유진, 슈와 가창력 멤버였던 바다까지 또한 외국어 구사 능력까지 고려된 결과였다.

당시 S.E.S. 후보였던 연습생은 총 8명으로, 바다가 먼저 리드 보컬로 정해지고 난 뒤, 유진과 슈가 서브보컬로 정해졌다.

바다는 안양예고 재학 시절 교내 축제 무대에 선 것을 계기로 이수만에 의해 발탁되었다. 원래 바다는 뮤지컬 배우를 꿈꿨으나 아버지의 병환으로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면서 대학 진학이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는데, 이수만이 대학 학비 전액을 지원해 주면서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가수 준비를 하게 됐다. 유진은 H.O.T.의 화보집 촬영차 괌에 갔던 캐스팅 디렉터와 이수만의 눈에 띄어 발탁이 되었고 슈는 god 손호영, 데니 안, NRG 김환성과 함께 혼성 그룹을 준비하던 중 롯데월드 지하상가에 놀러갔다가 S.E.S. 제의를 받게되면서 둘을 남겨두고 먼저 가수로 데뷔하게 되었다. 세 사람에겐 각각 바다, 유진, 슈라는 이름이 주어졌고, 각자의 이름자를 따서 S.E.S.라는 팀명이 결정되었다..

오랜 준비와 투자, 트레이닝 기간을 가졌던만큼 S.E.S.에게 좀 더 야심적인 음악이나 화려한 이미지를 씌워 줄 법도 했지만 SM은 오버하지 않았다. 오히려 S.E.S.를 통해 보여진 것들은 무척 심플하고 소박한 것이었다. 이것저것 다 하려 했던 다른 여성 그룹들과는 달리, SM은 히트곡을 만들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공식에 충실했다. 곡이 좋을 것. 노래를 잘할 것. 가수가 매력적일 것. 그리고 다른 요란한 이미지들 대신 그 바탕 위에서 극도의 세련미를 추구했다. 가수의 외모는 비현실적일 정도로 깔끔하고 청순한 이미지로 단장되었고, 꽉 짜여진 안무와 감각적인 뮤직비디오가 보태졌다.

 

해체

2002년 12월 19일, SM 엔터테인먼트에서 유진이 SM을 떠나 독자적인 활동을 하고 싶다는 뜻을 밝혀 재계약을 하지 않기로 합의했다고 발표함으로서 S.E.S.의 해체가 공식화되었다. 당시 SM은 유진과 바다가 SM과의 재계약을 포기했기 때문에 S.E.S.로 더 이상 활동을 하지 못한다는 것처럼 언플을 했지만, 오해하지 말아야 할 중요한 부분은 회사와 두 멤버간의 재계약 불발로 인해 팀이 깨지는 것이 아니라 멤버 셋 모두가 S.E.S.라는 팀을 마무리하고 개인적인 미래를 준비해야 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후 인터뷰에서 바다는 '세 멤버의 동의로 이루어진 해체'라는 점을 강조하였고, 일본활동을 마감하고 국내 활동을 준비할 당시부터 SM 잔류 여부와 상관없이 각자의 길을 걷기로 이미 합의를 끝낸 상태였다고 설명했다.

해체 발표 당일 S.E.S.의 해체 여파로 SM의 주가가 6.25% 급락했는데, 이에 SM은 그동안 S.E.S.의 음반 판매가 부진했기 때문에 소속사에서 많은 투자를 해오지 않았고 올해 활동이 다소 부진했기 때문에 협상결렬이 전체 매출에 미치는 영향이 크지 않을 거라고 했지만, 알다시피 S.E.S.의 음반 판매량은 SM 내에서도 상위를 다투는 수준이었고 2002년만 하더라도 가수 보아에 이어 SM 내에서 두 번째로 높은 음반 판매고를 올렸기 때문에 저런 언플이 먹힐 리가 없었다.

바다는 MP엔터테인먼트와 20억 계약설이 있었으나 양측의 입장차이로 계약이 무산되면서 웅진코웨이개발 산하 웅진 미디어와 5억원에 전속계약을 체결하고, 유진은 S.E.S. 데뷔 당시 SM 엔터테인먼트에서 매니지먼트를 맡았던 정해익과 4억원에 계약, 슈는 그대로 SM 엔터테인먼트와 재계약을 맺게 된다.

 

여담
  • 대한민국 걸그룹 최초로 해외 가요차트 1위를 석권하였다.
  • 한국 대중 가수 최초로 마이클 잭슨과 같은 무대에서 공연하였다.
  • 여가수 최초로 누나 부대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 대한민국 최초로 인터넷으로 콘서트 티켓을 예매하였다.
  • 걸그룹 최초로 올림픽체조경기장에서 콘서트 티켓을 매진시켰다. 
    (추후에 많은 걸그룹이 올림픽체조경기장에서 콘서트를 열었으나 티켓 매진은 S.E.S., 블랙핑크, 소녀시대뿐이다)
  • 가요 프로그램에서는 1위를 많이 수상하고 여러 상을 휩쓴 S.E.S.는 아이돌 1세대 6대천왕(혹은 4대 천왕) 중에서는 유일하게 연말 가요 대상과는 인연이 없는데, 주로 연말에 컴백해서 해를 넘겨 활동하다보니 시상식에서 손해를 많이 보는 편이었다. 대표적인 게 신인상인데, 당시 음반 판매량이나 인기로 봤을 때 당연히 전 시상식에서 신인상을 석권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2집을 발표한 지 얼마 안 됐다는 이유로 후보에서 제외가 되는 등 이래저래 피해가 많았다. 게다가 같은 기획사 내에 H.O.T.라는 절대 강자가 있었기 때문에 여자 가수상은 언감생심 꿈도 못꾸는 상황이었다. 당시 1999년 KMTV 《가요대전》에서 여자댄스가수상 수상이 예정되어 있었으나 가요대전 당일 KM 측에서 일방적으로 수상을 취소하면서 갑작스럽게 스케줄이 취소돼 버리는 일도 있었다. 이는 연제협과 SM의 불화에서 비롯된 것이었는데 H.O.T.가 전 부문을 석권한 상황에서 무시무시한 H.O.T. 팬들의 심기를 건드릴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나마 만만한 S.E.S.를 희생양 삼아 SM 독점 수상을 저지당한 꼴이었다.
  • 방송의 날 50주년 기념으로 KBS 라디오 《홍진경의 가요광장》에서 104명의 가수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조사 결과 S.E.S.가 총 35표를 얻어 여그룹 부문 1위를 차지했다. 뒤를 이어 핑클, 빅마마, 소녀시대, 펄시스터즈&서울시스터즈 순으로 2~5위를 차지했다.
  • 2010년, 음악 관계자를 대상으로 한겨레에서 실시한 최고의 아이돌 설문조사에서 4위에 선정됐다. 1위는 보아, 2위는 소녀시대, 3위는 빅뱅, 4위는 S.E.S., 5위는 동방신기가 차지했다. 1세대 아이돌로는 유일하게 순위권에 포함됐다.
  • 2014년, 빌보드가 뽑은 역대 K-Pop 걸그룹 TOP 10 중 한 팀으로 선정됐다. 빌보드는 S.E.S.를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케이팝에 엄청난 충격을 준 그룹'이라고 소개했다. 이어, '당시 남성 지배적이던 가요계에 태풍을 몰고 온 격'이었다며, '중독적인 비트에 따라 하기 쉬운 가사, 스쿨걸 이미지 등으로 쟁쟁한 히트 메이커들을 재치고 큰 인기를 얻었다'고 설명했다.
  • 한창 활동하던 당시 인기 프로그램이던 일요일 일요일 밤에 게릴라 콘서트에는 2번(2001년, 2002년, 둘 다 대구) 출연했는데 두번 다 성공했다. 특히 2001년 출연 때에는 당시 최고 시청률을 기록해서 지금도 S.E.S.하면 게릴라 콘서트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 영원한 가요계의 요정이란 소리를 듣고 있지만, 사실 대놓고 요정 컨셉으로 나간건 2집 뿐이다. 1집은 사랑스러운 여자친구 컨셉이였으며 3집부터는 요정보다는 세련된 도시 여자 이미지가 더 강했다. 하지만 워낙 2집 때의 요정 컨셉이 강렬한 임팩트를 가지고 있었고 또 본인들도 활동 당시 요정이미지에 대한 강박관념에 언제나 시달렸다고 하는데, 이때는 화장실도 마음대로 못 가서 주로 주유소 화장실을 이용하였으며 심지어 유진같은 경우는 탄산음료나 커피조차 마시지 않았다고 한다.
  • 1집 활동때는 치마 의상을 전혀 입지를 않아서 팬들조차 왜 치마를 입지 않느냐고 문의 할 정도였다고... 결국 2집 후속곡 <너를 사랑해>부터 치마를 입기 시작한다.
  • 활동한 모든 타이틀곡들과 후속곡들이 커버된 걸그룹. 1집에서 5집까지 활동한 모든 타이틀곡들과 후속곡들 모두 TV 무대, 라디오, 각종 오프라인 행사 등에서 노래와 댄스가 커버되었다. 심지어 3집의 팬서비스로 메들리로 활동한 샤랄라와 활동하지 않은 5집 수록곡 달리기도 커버되었다. 대한민국 역대 걸그룹들중에 활동한 모든 타이틀곡들과 후속곡들이 다른 걸그룹들이 커버해서 음악적으로 사랑받은 걸그룹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이후 같은 소속사 후배 걸그룹인 레드벨벳이 <Be Natural>을 리메이크 했으며, SM Rookies의 여자 멤버들도 <I'm your girl>을 리메이크했다.
  • 남편과 동갑인 멤버()와 남편보다 연하인 멤버(유진), 남편보다 연상인 멤버(바다)가 공존한다. 즉, 연상연하동갑 커플을 동시에 볼 수 있다.
  • 일부 악질 안티들에 의해 S.E.S.가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했다는 내용의 글이 꾸준히 올라오고 있으나, 이미 각종 기사와 팬들의 증거 자료를 통해 전면 부정된 사실이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커녕 팬들조차 관심을 갖지 않고 있다. 발단은 1998년 11월에 방송된 SBS 기쁜 우리 토요일에서 S.E.S.가 절 같은 곳에서 사진 촬영하는 것을 두고 신사 참배한 게 아니냐는 논란이 일게 된 건데, 촬영 장소가 야스쿠니 신사가 아닌 도쿄의 하마리궁이란 게 밝혀지면서 순식간에 쉰떡밥이 되고 말았다. 팬들에 의해 밝혀진 바에 따르면, S.E.S.가 촬영한 신사에는 계단이 있지만 야스쿠니 신사에는 계단이 없다는 점 , S.E.S.가 촬영한 신사의 약수물 구조와 야스쿠니 신사의 약수물 구조가 전혀 다르다는 점 등 방송 캡처와 실제 신사 내 사진을 일일히 대조한 결과 야스쿠니 신사와 전혀 무관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무엇보다 논란이 된 영상을 보면 S.E.S.가 나무끈에 흰 천을 매달면서 소원을 비는 모습이 나오는데 이것이 어떻게 신사 참배를 했다는것인지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다. 안티들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매국노니 뭐니 설쳐댄 탓에 괜한 욕을 20년째 먹고 있다.
  • 멤버 전부 SM관계자의 컨택 오디션으로 데뷔하게 되었다.
  • NCT127의 "Dreams come true"는 S.E.S.의 2집 타이틀곡 "Dreams come true"를 오마쥬한 것이다.2분50초 참고
  • 멤버 전원이 딸이 하나 이상 있다.

 


 

 

정규 앨범
집수 앨범명 활동곡 발매일
1 S.E.S I'm Your Girl, Oh, My Love 1997년 12월 24일
2 Sea&Eugene&Shoo Dreams Come True, 너를 사랑해 1998년 11월 23일
3 Love Love, Twilight Zone, 샤랄라 1999년 10월 29일
4 A Letter From Green Land 감싸 안으며, Be Natural, I will... 2000년 12월 23일
4.5 Surprise 꿈을 모아서, Unh Happy Day 2001년 07월 11일
5 Choose my Life - U U, Just a Feeling, 달리기 2002년 02월 14일
6 Friend Soul to Soul 2002년 11월 21일
7 Remember Remember, Candy Lane 2017년 01월 0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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젝스키스 프롤로그

2020. 5. 2.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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젝스키스 로고
1997년 ~ 2000년 (고지용 포함 6인)
2016년 ~ 2018년 (강성훈 포함 5인)
2019년 ~ 현재 (강성훈 제명)

 

그룹명 Sechs Kies
젝스키스
前 멤버 고지용
( 高志鎔 / 80 / 2000년 5월 20일 해체 )

강성훈
( 姜成燻 / 80 / 2019년 1월 1일 제명 )
멤버 은지원
( 殷志源 / 78 /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 A )


이재진
( 李宰鎭 / 79 / 부산광역시 사하구 / O )


김재덕
( 金在德 / 79 / 부산광역시 사하구 감천동 / B )


장수원
( 張水院 / 80 / 서울특별시 서초구 / A )
데뷔 1997년 4월 15일
정규 앨범 [학원별곡]
활동기간 1997년 4월 15일 ~ 2000년 5월 20일 (해체)


2016년 3월 31일 ~ 현재
소속사 DSP미디어 (1997년 ~ 2000년)


YG엔터테인먼트 (2016년 ~ 현재)
공식색 노란색
팬덤 Yellow Kies (옐로우키스)

 


 

개요

1997년 4월 15일에 DSP미디어 소속으로 데뷔한 대한민국의 4인조 보이그룹이다.

2000년 5월에 해체되며, 2016년 4월에 재결합을 하고, YG엔터테인먼트에 소속되어 활동을 시작하였다.

1997년~2000년 활동 당시 H.O.T.와 함께 가요계 아이돌 돌풍의 쌍두마차였으며, 아이돌 팬덤의 시초로 알려져 있다.

공식색은 노랑이다.

그룹명 '젝스키스'는 독일어로 여섯 개의 수정이라는 뜻으로, 팀 내에서 멤버 세 명씩 블랙 키스와 화이트 키스로 구분했다.

블랙키스는 (은지원, 이재진, 김재덕), 화이트키스는 (장수원, 고지용, 강성훈)이다.

활동을 거듭하면서 이 컨셉은 초창기 컨셉으로 남는다.

젝스키스의 약칭인 '젝키'로도 주로 불리곤 한다. 공식 색은 노란색이며 팬클럽은 옐로우키스(옐키)이다.

1997년 4월 15일에 데뷔해 2000년 5월 20일 공식 해체했고, 2016년 무한도전 토토가 2를 통해 재결합하게 된다.

이후 고지용을 제외한 나머지 5인이 YG 엔터테인먼트와 계약을 체결하고 활동에 나서게 되었다.

2019년 1월 강성훈이 공식제명되어 4명으로 활동 중이다.

전 소속사인 DSP미디어는 젝스키스와 계약서를 쓰지 않았고, 지금까지 젝스키스 상표권을 신청한 바도 없다.

YG엔터테인먼트와는 계약서를 작성했고 상표권 또한 YG 측에서 정식으로 등록해 젝스키스의 상표권을 가지고 있다.

 

인기

1990년대 후반에 활동한 1세대 아이돌로, 3년이라는 짧은 활동 기간동안 수많은 히트곡을 내며 줄곧 정상권에 있었고, 다수의 음악 방송 1위를 비롯해 각종 가요 시상식 본상은 물론 98년 서울가요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하기도 한 정상급 아이돌이었다.

데뷔 초 10대 여성 팬덤이 상당했으며 활동할수록 젊은 여성 층과 남성 팬들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최초로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한 아이돌 그룹이면서 매년 단독 콘서트를 개최해 매진을 기록하였으며 2000년 해체 발표 후 드림콘서트(서울올림픽주경기장)에서 열린 고별 무대에 약 5만 명의 팬들이 몰려들었다.

음악 외적인 예능, 연기, 뮤지컬 등의 활동이 미비했던 당시에도 데뷔 초부터 고정 예능에 출연했고, 멤버 전원이 라디오 DJ를 하였으며, 영화, 뮤지컬에도 출연했고 젝키의 이름을 붙인 상품도 출시한 바 있다.

젝스키스가 건재하던 당시에는 (1998년 ~ 2000년 초) 같은 1세대 아이돌인 신화와 god보다 훨씬 높은 인지도와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이러한 평가는 젝스키스가 재결합 후 과거의 이력이 알려지면서 재평가가 이루어지게 된다.

특히 짧은 시간의 활동후 십수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잊지않고 있는 팬들의 관심에 대중들이 당대 인기를 실감하게 되며, 새로운 세대들까지 관심을 가지며 새로운 패러다임까지 제시하고 있다.

H.O.T.와의 비교 문제의 경우, H.O.T.와 격차가 컸던 것은 맞다.

하지만 당시 H.O.T. 팬덤 규모가 워낙 컸던 것이지, 젝스키스 자체의 절대적 인기치만 따지면 매우 높은 수준이었다.

즉 1위와 2위의 격차가 컸긴 하지만, 2위와 그 밑의 격차도 컸다.

그리고 젝스키스는 노래의 대중성이 확보된 경우가 많았다. 특히 커플은 역대급 대중성을 오랜 기간 유지했다.

참고로 양 기획사 입장에서는 라이벌 구도를 통해 동반 상승효과를 얻으며 많은 인기를 모으게 돼서, 서로가 서로에게 큰 도움이 되는 존재였다.

SM 이수만 사장이 고맙다며 젝키 매니저한테 밥도 사주고 등도 토닥여주는 일이 있을 정도였다.

2016년 재결합 후 상당한 규모의 팬덤을 보유하고 있다. 이전 활동 당시에 보유했던 기존의 팬덤과 동시에 재결합 소식 이후 새로운 팬덤이 유입되었다.

그 중에서도 특이할 점은 젝스키스가 오랜 공백을 딛고 시간이 많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어린 팬층을 적지 않은 비율로 보유하고 있다는 점인데, 때문에 팬들의 연령 스펙트럼이 꽤나 넓은 편이며 아이돌 팬덤 중에서도 독특한 케이스.

3년이란 짧은 활동 후 16년이란 세월이 지났음에도 떠나지 않은 수많은 팬들과 지금의 세대가 아닌 그룹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새로운 팬층까지 유입시킬 수 있는 저력있는 그룹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이들이 한창 활동했던 시기인 1997년~2000년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은 현재 기준 성인으로 성장했으며 해당 나이대의 현역 아이돌들과 선의의 경쟁을 벌이기도 한다.

또한 젝스키스는 16년이 지나 재 결합 당시에도 많은 팬들이 응원을 겉삼아 보고싶었다 다시 돌아와줘서 고맙다 등등 훈훈한 모습도 많이 보여줬다.

 

멤버 영입 과정

은지원과 강성훈이 제일 먼저 캐스팅이 되었고, 그 뒤를 이어 장수원, 이재진, 김재덕, 마지막으로 고지용이 젝스키스에 합류하였다.

'블랙 키스'와 '화이트 키스'를 K-pop 최초의 유닛으로 볼 수도 있지만, 개인 활동도 허용이 안되고 완전체로만 활동해야 했던 당시 분위기 상 실제 유닛으로 활동한 적은 없다. 활동목적이 아닌, 컨셉과 파트를 둘로 나눈 것으로, 실제로 데뷔 초엔 블랙 키스는 검거나 짙은 옷, 화이트 키스는 희거나 밝은 옷을 입고 나오곤 했으나 이후엔 이마저도 별 구분 없이 멤버 전원이 옷을 통일하게 되었다.

블랙 키스와 화이트 키스를 나누게 된 비화가 2016년 9월 10일 콘서트 Yellow Note에서 밝혀졌는데, 멤버들 중 유일하게 이재진만이 알고 있었다. 일본 그룹 V6가 멤버들끼리 나이차가 심해서 연령대를 기준으로 20th Century(토니센)와 Coming Century(카미센)로 구분하는데, 여기서 모티브를 얻은 것이라고 한다.

당시 은지원과 강성훈은 하와이에서 유학 중이었고 은지원은 클럽 DJ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당시 이호연 사장이 은경표 PD와 같이 하와이에 놀러왔었는데, 은지원이 일하고 있던 클럽 사장과 이호연이 친분이 있었다. 이호연은 클럽 사장에게 남성 듀오를 만들 계획이라고 말하자 사장은 은지원과 강성훈을 추천했다고 한다. 이호연은 클럽에서 즉석 오디션을 본 뒤 공식적으로 두 사람에게 가수 활동을 제안하였다. 제안을 승낙하고 한국으로 귀국한 둘은 듀엣 데뷔를 예정으로 대성기획에서 연습생 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던 중 H.O.T.가 캔디로 대박이 터진 것을 목격한 사장이 듀엣에서 6인조 아이돌로 노선을 변경하고 급히 추가 멤버 모집을 시작하였다. 이때 강성훈은 회사를 나가겠다고 강하게 반발했다. 하지만 사장의 설득으로 마음을 바꾸어 먹는다.

장수원은 본래 친구 따라 오디션에 따라갔으나 정작 친구는 떨어지고 본인이 합격한 경우다. 여기까지만 보면 흔한 아이돌 가수들의 합류 과정과 비슷하지만 정말 특이한 것은, 오디션장에서 잘 하는 게 뭐냐는 질문을 받고 장수원이 "아무것도 없는데요?"라고 답했더니, 사장이 솔직해서 좋다며 그대로 합격시켰다는 사실이다. 당시 장수원은 학교 댄스팀에 속해 있어 춤을 잘 췄고, 이에 1차 오디션을 통과하고 2차 오디션만 남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본인이 가수로 데뷔하겠다는 큰 의지가 없었고, DSP 측에서 2차 오디션에 나와달라고 전화를 했다고 한다. DSP 측에서 붙잡은 면이 큰 것이다(2차 오디션에서 위 발언이 나왔다고 한다). 이 점은 2015년 1월 8일 SBS 박소현의 러브게임에서 박소현도 증언했다. 당시 박소현도 DSP 소속이었는데, 이호연 사장한테서 젝스키스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한다. 그 중에서 장수원의 경우, 친구 따라 왔는데 가수가 되려는 의지가 별로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사장님은 무조건 잘된다고 하길래, 저 친구의 어떤 모습을 본 걸까 의아했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오랜 시간 지나도록 롱런하는 것을 보니, 사장님은 괜히 사장님이 아니라 느꼈다고 한다.해당영상

이어서 학창시절에는 부산에서 춤으로 유명했고 당시에 이주노의 소속사에서 연습생으로 있던 이재진과 김재덕을 스카우트해왔다. 당시 사장이 이주노 사무실에 찾아와서 둘을 보고는 김재덕만 뽑아갔지만, 이후 이재진도 합류하게 된다. 이호연은 이재진이 화면으로 봤을 때 코가 너무 크다며 뽑기 싫어했는데, 은지원과 김재덕이 사장과 매니저를 설득해 뽑힐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학교 얼짱으로 유명했던 고지용이 강성훈의 추천으로 합류했다.

 

개인 활동
  • 은지원
    해체 이후 가장 성공적인 솔로 활동 및 예능을 지속하고 있다. 처음에는 G-Production이라는 자회사를 세워 음반을 냈다. 1집은 댄스 위주, 2집부터는 자신이 꿈꾸던 힙합 쪽으로 본격적인 전환을 한다. 3집부터 드렁큰 타이거와 손잡고 활동하여 타이틀곡 '만취 in melody'를 대중적으로 성공시킨다. 이후 1박 2일에서 은초딩 캐릭터로 자리매김하여 신서유기 등 예능에서도 큰 인기몰이를 하였고, 소속사를 차려 힙합 트리오 클로버로 활동하며 가요계 활동도 꾸준히 이어나갔다.
  • 김재덕
    김재덕은 군복무를 같이한 것을 인연으로 함께 동거까지 하게 된 토니 안이 운영하는 티엔네이션에서 음반 제작 부서의 프로듀서로 활동을 이어갔다. 2016년 동아TV 맛집남 시즌1에 김재덕 토니 안 은 공동 MC를 맡으며 브로맨스를 과시한다.
  • 장수원
    J-Walk라는 그룹을 결성하여 활동하고 있으며, 잔잔한 발라드와 미디움 템포 등의 장르를 내세워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특유의 중저음 톤으로 젝스키스 때보다 보컬이 훨씬 발전했다. 군 입대 전 마지막 음반 발매 이후 활동이 없는 상태였다가 2013년 9월부터 부부 클리닉 사랑과 전쟁 2의 아이돌 특집 3편으로 복귀하였고 미생물에도 출연하며 발연기의 전설이 되었다. 장수원 로봇 연기로 불리는 특유의 발연기를 아예 컨셉으로 잡고 예능 및 방송에서 활발히 활동 중이다.
  • 이재진
    해체 이후 DOUBLE J(1집), Go back(2집), 충전(3집)등 주로 댄스곡으로 활동했다. 2005년 솔로 3집을 끝으로 방위산업체에서 애니메이션 관련 일을 맡아 착실히 복무하였지만 서류상의 업무가 아닌 다른 업무를 맡았다는 이유로 재입대 처분이 내려져 병역 비리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2008년 8월에 현역으로 재입대하였으나 재입대 직전 홀어머니를 잃으며 우울증을 앓는 등 건강에 큰 이상이 생겼고, 급기야 2009년 3월에는 치료를 위한 휴가에서 복귀하지 않아 물의를 빚었다. 하지만 군 복귀 후 수색대로 보직을 변경해 성실히 복무하였다. 2010년 8월 전역 이후 일본 유학을 위하여 일본어를 공부해왔다고 하며, 자신의 원래 전공인 그림 쪽으로 나아가고 싶다는 뜻을 밝히며 대학에서 미술을 배웠다.
  • 고지용
    해체 이후 인터넷 방송 DJ와 연기자 데뷔를 준비하기도 했으나 2001년 이후 사실상 연예계와 인연을 끊었다. 그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한국으로 돌아와서 사업을 하고 있다. 2013년 11월에 의사 허양임과 결혼했고 2014년 10월 경에 아들 승재를 얻었다.
  • 강성훈
    발라드 가수로 선회하여 4장의 음반을 내는 등 2004년까지 솔로 활동을 지속했다. 2002년 2집의 "My Girl", 2003년 3집의 "아껴둔 이야기" 등이 사랑받았다. 이후 10년 동안 공백기를 가진 뒤 2014년 4월, 젝스키스 데뷔 17주년 기념 "커플" 리메이크 음원을 발표했다. 공백기 동안 병역 비리에 연루돼 재입대 처분을 받고 사기 혐의로 피소되는 등 여러가지 우여곡절이 있었다. 특히 유흥비에 쓰려고 지인들에게 11억 원을 사취했다는 의혹을 받아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었다. 사건 때문에 1심에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 받고 구치소에 수감되었다가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2016년 4월에 젝스키스 컴백 및 무한도전 측의 요청으로 MBC 출연 금지가 해제되어 무한도전에 출연할 수 있었다.

 

해체

젝스키스/해체

 

2000년 5월 18일, 기자회견을 갖고 해체를 발표했다. 당시엔 이유가 명확하게 언급되지 않아 상당한 논란이 되었다. 팬들은 이호연이 강제로 찢어놔서 해체당한 것이라는 루머를 인터넷에 수없이 퍼뜨렸다. 이는 2016년 젝키가 재결합하며 더욱 심해졌다. 그러나 그간 멤버들이 방송에 출연할 때 마다 이에 대한 질문이 자주 나왔고, 그때마다 강제 해체가 아니라고 밝혔다. 이재진의 경우 팬들의 루머와 비슷한 뉘앙스로 말한 바 있지만, 훗날 밝혀진 바를 보면 그것은 이재진 개인의 생각이었다. 다른 다수의 멤버들 생각은 달랐다.

 

재결합

젝스키스/재결합

 

여담
  • 로고 수정 모양, 멤버 수인 6, 젝스키스 첫 글자인 S, 그룹명이 모두 들어가 있고, 멤버 이재진이 디자인에 참여했다
  • 멤버 전원이 자연미남이다. 2016년 재결합 당시 30대 후반임에도 불구하고 동안이다. 날이 갈수록 젊어지는 것 같기도,,,,점점 리즈를 갱신한다. 어제보다 오늘 더 잘생겼고 오늘보다 내일 더 잘생길 것이다.
  • 맴버들이 하나같이 비글미를 뿜어낸다. 오죽하면 그 은초딩 은지원이 가장 정상인으로 취급된다. 예나 지금이나 맴버들끼리만 출연하는 방송분을 보면 대화의 주제가 시시각각 다른 산을 오르다가 아무말 대잔치로 변한다.
  • 이 그룹은 팬픽도 유명했다. 공식 팬픽은 젼훈(은지원,강성훈), 진죵(고지용,이재진), 숸덕(장수원,김재덕)이다.
  • 역대 가요계 라이벌을 대표하는 한팀으로 실제 팬덤의 규모는 경쟁그룹인 H.O.T.가 압도적으로 컸으나은지원 왈 "계란후라이였어" 활동하는 내내 방송가에서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다. 현재에도 언론에서 한팀이 언급되면 높은 확률로 같이 언급된다. 충성심이 높은 아이돌팬 특성상 상대그룹에 대해 악감정이 높아 확실한 타도세력이 많았던것도 사실이며, 세월이 지난 현재에도 존재한다. H.O.T.의 넘사벽 인기에 비하면 팬덤이 적은 것은 맞지만, H.O.T.를 제외하면 젝키에 대적할 수 있는 다른 아이돌은 없었다. 확실한 2인자로서 H.O.T.의 라이벌로 불리기에는 충분했다.
  • H.O.T. 팬들과 젝스키스 팬들의 신경전은 매우 치열해, 심할 때는 경찰까지 출동하는 일이 벌어졌다. 팬들의 직접적인 싸움이 워낙 격렬해서 항상 구급차가 상주하다시피 했을 정도였다. 당시 싸움이 격렬했던 만큼 큰 사고도 많았다.
  • 반면 젝스키스 멤버들은 H.O.T. 멤버들과 관계가 꽤 좋은 편. 김재덕 토니 안과 10년이나 동거하고 있을 정도고, H.O.T.의 재결합도 평소 친하게 지내던 젝스키스의 재결합에 자극을 받았다. 90년대 H.O.T.의 무협팬픽인 협객기가 시중에 출판되었을 당시 소속사에서 멤버들의 상표권 같은 문제로 소송을 걸었는데, 사유 중 하나가 좋은 관계로 지내고 있는 은지원을 작중에서 H.O.T. 멤버가 살해하는 묘사가 있어 명예훼손이 우려된다는 것이었을 정도다.팬픽에서마저 상대 멤버 못죽여 안달인 팬덤싸움 클라스
  • 원래 그룹 이름 후보들이 하나같이 주옥같다. 마그마, 용암,  등. 특히 육계장이 유력했던 모양이다. 이에 맞춰 공식색도 빨간색이 될 뻔 했다. 그룹 초기에 공식색이 노랑 말고도 빨강이 포함되었던 것은 이 영향이다. 이후 사장이 MBC 은경표 PD에게 작명을 부탁했고 그 결과 젝스키스라는 이름이 탄생했다. 은경표 PD는 이호연사장과 96년도에 하와이로 놀러갔었는데, 이때 이호연이 은지원과 강성훈을 스카우트 해왔었다. 하와이에서 강성훈과 은지원이 이호연 앞에서 오디션을 볼 때, 은경표 PD도 그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젝스키스라는 이름을 괜히 지어준 것이 아니었다. 콘서트 Yellow Note에서 후보였던 이름들을 언급했다. 은지원 육개장이 건강식이니 괜찮다고 밝혔다.
  • 소속사가 음반을 내기도 전인 1997년 3월부터 각 통신망에 멤버들의 사진과 새로 나올 음반에 대한 정보들이 제공했다. 그로 인해 젝스키스는 매체에 출연하기도 전부터 10대들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데뷔 무대 때부터 팬들이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라디오스타에서 김재덕이 한 말에 따르면, 데뷔 전인데 팬들이 자신의 숙소에 들어와 자는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었다고 한다.
  • 1999년 11월 29일 평양에서 2000 평화 친선 음악회에 참가했다. 멤버 강성훈을 여성으로 알고 혼성 그룹으로 표기하여 여러 사이트에서 화제가 되었다. 2008년 놀러와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당시 매니저 등은 모두 한국에 남고 이호연 사장만 동행 가능했다고 한다. 또한 말을 잘못하면 체크를 해, 그 기준을 넘으면 북한에 억류된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래서 핑클이랑 젝키 10명이서 한방에 둘러앉아 있을 때, 도청될지도 모르니 서로 말 조심하자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때 은지원이 갑자기 '나는 공산당이 싫어' 라고 하더니, '이거 고지용이 한거에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은초딩은 이때부터 이미 시작된 듯... 2015년 해피투게더에 성유리가 출연했을 때, 당시 평양에서 젝스키스와 찍었던 사진을 공개하기도 했다.# TV에 평양이라 하면 단골로 나오는 장소다.
  • 한편 뮤직비디오를 감독 사비로 찍게 시켰다는 루머를 퍼뜨리는 경우가 있는데, 정확한 사실 관계는 어떤 신인 감독이 Road Fighter 노래가 너무 마음에 들어 자기네 회사에서 비용을 전액 부담해 뮤비를 찍고 싶다고 DSP에 연락하여 찍었다는 것이다.(출처 : #) 놀랍게도 그 감독이 빅뱅 2NE1, 블랙핑크의 뮤직비디오를 대부분 연출한 YG 뮤직비디오 전담 감독 서현승이다. 해체 16년 후 젝키가 YG로 오게 됐으니 사람 인연이란 것이 참 희한하다.
  • 데뷔 당시 고지용이 폼생폼사로 활동하는 것을 극구 반대했으나, 은지원이 이 곡으로 무대에 오르자고 밀어붙여 수록곡으로 묻힐 위기에서 벗어났다는 '카더라'가 있다. 이외 3.5집을 준비할 당시 이호연 사장은 은지원의 똥고집에 머리를 썩히다 은지원의 '자신이 다 책임지겠다'는 말에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들었고, 그렇게 "커플"이 3.5집 타이틀곡이 되었다는 카더라 통신도 있다. 커플 때에는 사장이 반대하는 것이다보니 분위기가 상당히 험악했다는 소문이 있다. 다만 위 서술은 출처가 없고 어디까지나 팬들 사이에 있는 소문이다. 아무튼 그 소문이 사실이라고 가정하면, 은지원의 선구안이 뛰어났던 것이다. 회사 측에서는 커플을 타이틀곡으로 선정하는 것을 주저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마경식은 작곡가로서 그때까지 제대로 된 히트곡이 없었다.# 게다가 기존에 해오던 음악과 정반대 느낌의 곡을 작곡했다. 커플 노래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슬래쉬메탈 그룹 아발란쉬의 보컬이었다.가창력이 엄청나다 커플 이미지는 1도 안 떠오르는 모습이다 반면 3.5집의 '너를 보내며'를 작곡한 김석찬은, 핑클 내 남자친구에게로 초대박을 쳤던 상황이었다. 게다가 '너를 보내며' 노래 자체도 충분히 타이틀곡으로 지정할만한 퀄리티다.# 젝키의 대부분 뮤비가 그렇지만, 그 중에서도 커플 뮤직비디오는 사무실 문짝이 나오는 등 유독 저퀄리티다. 커플 타이틀곡 문제로 사장이랑 대판 싸워서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 데뷔 당시 보컬 트레이닝을 받지 않았다. 메인보컬인 강성훈조차 보컬 레슨을 받지 않고 평소 노래 실력 그대로 데뷔한 것이다. 장수원은 해체 후에 피눈물을 흘리듯이 연습하여 득음했다. 춤은 위에 각주에 달아놓은 이재진의 컴백 자서전 원문을 보면 꽤 기간을 들여 연습한 것으로 보인다. 자서전을 보면 연습생 시절 회사에서 기계체조까지 가르쳤다고 한다. 팔 뻗는 것만 반 년 연습했다는 말도 있다. H.O.T. 데뷔 후 급히 멤버들을 모아 데뷔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 계약서도 작성하지 않고 멤버들조차 정확한 수익 분배를 모르는 상태로 활동했기에, 일부 팬들은 젝스키스로 번 돈을 핑클에게 투자하느라 젝스키스의 살인적인 스케줄이 이어진다고 생각하며 비난을 했다. 다만 이 과정에서 허위 사실이 유포되어 있기도 하다. 자세한 내용은 젝스키스/DSP 관련 루머 문서를 참고할 것. 멤버들이 정확한 수익 분배를 몰랐던 것은 정산이 부모와 회사 간에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러한 일들로 인하여 상당수의 젝스키스 팬들은 핑클을 싫어했지만 처음부터 그랬던것은 아니다. 핑클의 데뷔전 젝스키스 후배로 걸그룹이 데뷔한다고 하여 젝스키스 팬들은 누구보다 기뻐했고, 기대했다. 일부 팬들은 핑클이란 이름도 지어주는데 큰 일조를 하였다. 하지만 핑클 데뷔후 멤버간의 스캔들, 핑클로 인한 왕중왕 실패, 소속사의 차별대우가 보이면서 젝스키스 팬들은 핑클을 좋아할수 없었고 이후 팬덤 간의 사이도 나빠지면서, 핑클에 대한 안티활동도 심했다.# 물론 젝스키스와 핑클 당사자들은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북한에 공연 갔을 때 방에 모여서 같이 이야기를 하며 놀았다고도 했고, 실제로 각 팀의 리더인 은지원과 이효리는 친한 편으로 알려져 있다. 2003년에는 은지원이 신촌에 실내 포장마차 점을 개업했는데, 보통 여기저기 동료 연예인들을 불러야 홍보에 도움이 되지만 은지원은 사람을 불러 모으는 일에 익숙지 않다는 이유로 연락을 전혀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던 중 이효리가 새벽에 제발로 찾아왔는데, 은지원은 이효리를 "손님이 많아 자리가 없으니 가라"고 돌려보냈다. 그러자 종업원들이 "남들은 이효리 못 불러서 안달인데 그냥 보내면 어떡하냐"며 은지원을 혼냈다고 한다. "자리는 여분의 탁자로 만들면 된다"며 흥분하는 종업원들의 말에 은지원은 '왜 난리지'하는 표정으로 대답 없이 눈만 껌벅거렸다고...기사 김재덕은 2015년 라디오에 출연했을 때, 당시 같은 소속사였던 핑클과 친하게 지냈으며, 가끔 술도 한 잔 했었다고 말했다.# 2012년 3월 25일 SBS 정재형 이효리의 유 & 아이에서는 이효리와 은지원이 같이 출연했다. 이효리는 당시 젝키와 H.O.T.의 1위 대결에서 젝키가 지면, 같은 소속사라는게 뭔지 우리가 뭔가 진 것 같고 눈물이 났었다고 밝혔다. 은지원도 핑클이 어디 대결 나가면 잘하라고 응원했다고 말했다. 동료 연예인들을 깎아내려서 좋을 게 없으므로 드러내지 않는 것일 수도 있지만, 젝키 멤버들은 소속사에 불만이 있었다거나 소속사 때문에 힘들었던 이야기는 종종 언급했어도 핑클에게 악감정을 드러낸 적은 없...었는데 2016년 6월 1일 방영된 라디오 스타에서 '전 소속사의 관심이 핑클에게 옮겨지고 우리는 홀대받은 것 같다'고 섭섭함을 토로했다. 물론 핑클을 비난한 것이 아니라 전 소속사에 불만을 털어놓은 것이다. 하지만 핑클도 무계약 상태에서 활동했고, 새벽1시30분에 재벌 오너들의 술자리에서 2곡을 부르고 3천만원을 받았다는 잡지 문구가 있는 것을 보면, 어디까지나 젝키보다 대우가 좋았다는 것이지 딱히 공주 대접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핑클도 하루 평균 2시간씩 자며 스케줄을 다닐 정도로 빡세게 활동했다. 하지만 아무 탈 없이 소화해서 매니저가 천하장사라고 불렀다고...# 다만 핑클은 젝키보다 후발주자라서 더 안정적으로 시작할 수 있었기 때문에 유리한 위치이긴 했다.
  • 젝키와 핑클은 동시대에 활동했지만, 젝키와 달리 핑클은 각주와 같이 소속사와의 사이가 좋게 끝났다. 이런 차이에 대해 훗날 밝혀진 바를 보면, 젝스키스는 김기영 라인이고 핑클은 길종화 라인이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DSP 이호연 사장이 제일 위에 있고 그 밑으로 김기영과 길종화 2명이 있었는데, 이 두명이 서로 세력다툼을 한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이 둘은 고등학생 때부터 이호연이 데리고 있으면서 대학 학비까지 대주며 키웠다.# 다만 이호연이 뇌출혈로 쓰러진 시점 전후로 해서 둘 다 DSP를 나왔다. 김기영 라인은 젝스키스, 클릭비, SS501로 알려져 있고, 길종화 라인은 핑클, 카라로 알려져 있다. 김기영과 핑클은 거의 상관이 없었다고 한다. 김기영의 경우, 2016년 라디오스타에서 젝키 멤버들이 해체이유에 대해 말할 때 사장님과의 관계가 아니라 매니저(김기영)랑 사이가 안 좋았다고 말할 정도였다. 김기영 본인 인터뷰에서도 해체 이후 젝키 멤버한테서 전혀 연락이 오지 않았다고 밝혔다.# 반면 길종화의 경우, 2012년 본인 결혼식 때 옥주현 이효리가 축가와 사회를 맡을 정도였다.# 이효리는 길종화가 나와서 차린 B2M엔터테인먼트로 이적했는데, 당시 계약서를 쓰지 않고 계약금을 받지도 않았다. 그리고 계약이 오래전에 끝났는데도 계속 의리로 남아있기도 했다.기사 성유리는 2015년 인터뷰에서 "종화 오빠 생각이 많이 난다"며, "S.E.S. 친구들을 보면 요정같고 귀여운 장난을 치곤 하던데, 우리는 네 명이서 힘을 모아 매니저 오빠를 괴롭혔다.젝키랑 같은소속사 아니랄까봐 그래서 오빠들이 저희 때문에 힘들어 했다"고 털어놨다.#
  • 2007년 8월 20일 핑클 이진이 야심만만에서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를 말했다. 데뷔전 연습생 시절 사장님이 보고 있으면 열심히 연습하다가 사장님이 나가시면 딴 짓을 했는데, 당시 젝키한테 선물이 쌀자루로 몇개씩 오면 그때 그걸 풀어봤다고 한다. 그리고 갖고 싶었던 것 있으면 양심상 하나만 챙기고 다시 다 정리해놨다고 한다. 영상을 보면 헛나온 이야기에 자기도 당황하고 있고, 계속 죄송하다고 하고 있다. 01:02:40 정도부터 보면 된다.
  • 이재진의 매제이자 젝키의 현 소속사 사장은 한국 연예계에서 대형기획사 양대산맥 중 하나로 불리는 곳의 수장이다. 그 덕분에 눈치 안 보고 지상파에서 해체 당시의 상황을 직접 말할 수 있게 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이렇게 생각하기는 어렵다. 애초에 이호연 사장은 몇년째 거동불가능한채 말도 못하는 상태로 병상에 누워있고, DSP는 이호연이 쓰러진 후 많은 직원이 나가거나 쫓겨나서 현재 젝키 시절 직원은 거의 없다. 회사 자체 상황도 암울하다. 이에 그런 이야기를 할 때 눈치를 볼 대상 자체가 이제는 없다시피 한다.
  • 2016년 젝스키스의 재결합 후 YG엔터테인먼트와의 계약 소문이 돌자, 이호연 전 사장이 거동불가능한채 누워있는데 인사는 하러 왔어야 하지 않냐며 YG에 앞서 DSP에 연락했어야 한다는 언플 기사가 나왔다. 이에 대해 젝키 팬들이 몰려와서 해당기사 댓글은 악플 일색이다해당기사. 6년째 거동불가능하고 말을 못하는 상태로 누워있는 이호연이 기사를 냈을리는 없는데, 병상에 누워있다 뜬금없이 욕을 엄청 먹게 되었다. 이 언플은 이호연 사장의 공로를 부각시키는 효과보다는, 대량의 악플과 허위 루머 유포 같은 부작용이 더 컸다. 최다추천 댓글 내용들을 보면 허위루머의 총집합 편일 정도다. 강제로 해체당했다, DSP 측이 젝키 상표권 신청했다가 거절당했다, 젝키로 소속사가 300억이나 벌었다, 밤무대 돌렸다, 술자리 불러냈다, 3000만원 행사 뛰고 80만원 받았다는 등의 내용인데, 젝스키스/DSP 관련 루머 문서에서 보듯이 이는 사실로 보기 어렵다. 그러나 팬들에 의해 최다추천에 박아놨으니, 이 기사를 계기로 일반인들이 그런 루머를 믿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만 해당 언플 기사를 낸 DSP 또한 비판을 피할 수는 없다. 젝키 시절 회사와 트러블이 심했다는 것은 사실이고, 젝스키스 팬덤이 이호연 사장에 대해 악플로 도배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상황이었다. 특히 요즘 대중들은 저런 식의 기사를 "앞에 인사 얘기는 그냥 쓴 것이고 결국 DSP랑 계약하자고 언플한거네"라고 받아들인다. 실제로도 그런 목적이 있었다면 어리석은 판단이다. 왜냐하면 DSP에 대한 일반인들 시선조차, 이호연 사장이 쓰러진 이후 회사가 쇠퇴하여 젝스키스를 감당할 능력이 안된다고 봤기 때문이다. 젝키 멤버들 생각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결국 아무 성과 없이 욕만 먹은 언플이다. 이호연 사장이 물러난 이후 각종 오판들로 쇠퇴한 경력을 봤을 때, 그런 오판들의 연장선 상에 있다고 보인다. 물론 이호연 사장이 젝키를 만들고 키웠으니, 6년째 식물인간처럼 누워있는 사장한테 병문안 좀 오라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는 개인적으로 하면 될 일이지, 저런 식으로 언플할 사안은 아니었다. 게다가 말도 못하고 거동불가능한 상태인 이호연이 기사에서 나오는 의견을 개진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아예 저런 기사가 나왔다는 사실조차 모를 가능성이 높다. 기사 대부분이 기자의 상상이거나 DSP 측의 의견일 것이다.
  • 젝키 팬덤이 이호연을 저주하는 수준으로 싫어했던 것이지, 젝스키스 멤버들이 그런 관계는 아니었다. 해체 이후 직접 이호연에 대해 언급한 바를 보면 다음과 같다. 은지원, 장수원, 김재덕은 2013년 DSP 페스티벌에 참석해서 공연을 펼쳤다. 은지원은 "사장님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다. 사장님은 늘 우리가 무대를 하면 뒷편에 서서 함께 해주셨다. 오늘은 몸이 좋지 않으셔서 참석 못하셨다"라며 "사장님 덕에 우리가 아직도 이렇게 무대에 설 수 있는 것 같다"며 고마움을 전하며 "의리"를 외쳤다. 이어 김재덕 역시 "이호연 사장님의 빠른 쾌유 바란다"고 덧붙였다.## 김재덕은 OBS와의 인터뷰에서는 "젝스키스가 있기까지 DSP라는 기획사가 있었고, 또 사장님에게 고마움을 많이 느끼고 있기 때문에 출연 결정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영상 22초부터 강성훈은 2015년 1월 30일 러빙핸즈에서 "팬들은 (이호연 사장님을) 안 좋아하지만 DSP 사장님이 젝키를 위해서 많은 일은 하신 건 맞아.. 마지막에 안 좋게 끝나서 그렇지."라고 말했다. 이재진의 경우 대놓고 싫어한다는 말을 하고 다녔다. 과거 싸이월드 시절 호연이라는 이름을 가진 팬이 글을 남기자, 답글로 "호연이라.."라며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젝키 결성 당시 6명 중 유일하게 이호연이 탐탁치 않아했던 멤버가 이재진이다. '화면으로 보니 코가 커서 안 되겠다'고 퇴짜를 놓았지만, 나중에 은지원, 김재덕이 회사를 설득하여 멤버로 데려왔다고 한다.영상 14분부터 이때부터 악연이 시작됐는지도 모르겠다. 기타 김현중의 2013년 아시아 경제 인터뷰#에서 "은지원 형도 이효리 누나도 다 지금은 이적을 했지만 전 회사를 그리워해요. 사실 회사를 옮기고 나서 이전 회사를 그리워하는 경우는 많지 않잖아요. 하지만 모두가 그리워하는 걸 보면 사장님은 참 좋고 대단한 분이셨던 것 같아요. 역시 정이라는 것은 위대하다는 걸 느끼죠."라고 말한 바 있다. 그렇더라도 90년대 SM가수들이 지금도 수시로 이수만을 찬양하는 것과 비교해보면 이호연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는 편이다. 이는 이수만은 여전히 권력의 정점에 있는 반면, 이호연은 병상에 누워있던 신세인 면이 클 것이다. 2016년 라디오 스타에 출연해서 해체이유에 대해 말했는데, 이호연 사장과의 관계가 아니라 가깝게 지내던 매니저(김기영으로 추측됨)와의 사이가 나쁜 것이 원인이었다고 밝힌바 있다.
  • 재결합 당시 DSP와 계약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젝스키스 멤버들은 2016년 12월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아래 인터뷰에 언급된 이호연 사장의 경우, 명목상 대표라고는 하지만 뇌출혈로 인해 거동이 불가능하고 감정표현 정도만 가능한 상태로 수년째 누워만 있다. 이에 본 발언은 결국 완전 다른 회사가 됐다는 뜻이다.

“DSP미디어는 우리가 활동할 당시와 전혀 다른 회사였다.”


그룹 젝스키스가 재결합 활동을 데뷔 당시 소속사인 DSP미디어와 협의하지 않은 이유를 이 같이 밝혔다. 젝스키스는 1일 서울 마포구 YG엔터테인먼트 사옥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재결합을 하며 DSP미디어를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면서도 “(과거) 대표님은 편찮으시고 매니저는 단 한명도 누군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전혀 다른 회사였다”고 말했다. 은지원과 제이워크로 활동했던 장수원, 김재덕은 과거 DSP미디어 가수들이 모두 출연한 패밀리 콘서트에도 출연한 적이 있다. 당시에도 과거 함께 일했던 매니저는 없었다고 했다.
http://entertain.naver.com/read?oid=018&aid=0003690448


과거 소속사였던 DSP미디어와의 연결점
“DSP는 우리가 알던 과거 소속사가 아니었어요. 이호연 대표님 말고는 우리가 아는 스태프는 아예 없죠. 다른 회사가 돼 있는 곳이라 교감할 수 없었어요.”(장수원 강성훈 은지원)
http://allets.com/bbs/board.php?bo_table=allets&wr_id=656&sca=STAR


과거 소속사 DSP미디어가 아닌 YG와 손을 잡게 된 이유도 솔직하게 전했다. 은지원은 "예전에 DSP 패밀리 콘서트에 갔는데 저희가 활동할 때 있던 분들이 단 한분도 없었다. 이호연 사장님 외에 다른 회사가 되어있어서 당황스러웠다"고 말했다.
http://entertain.naver.com/read?oid=111&aid=0000473169


이는 그냥 둘러댄 말이 아니라, 사실을 말한 것이라고 보인다. 왜냐하면 2011년 카라 전속계약해지 통보 사건에서, 카라 측의 주장과 같은 내용이기 때문이다.

현재 카라 측은 dsp의 매니지먼트 미숙에 대해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들이 문제로 삼는 것은 카라 매니지먼트를 총괄하는 DSP 이호연 사장의 부인이다.

작년, 이호연 사장이 뇌출혈로 쓰러진 이후 사장 부인이 경영권을 쥐게 된 가운데, 그녀는 연예 소속사 관리 경험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소속사 경영을 시작, 그로 인해 많은 중역 간부들이 회사를 떠났다고 한다. 이들 중역 간부 또는 베테랑 직원들은 핑클, ss501 등의 매니지먼트 경험을 가지고 있는 매니지먼트 전문가들이었다.

또한 사장 부인은 카라의 매니지먼트를 함에 있어서도, 세세한 것까지 일일이 지지해 카라 멤버들과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것이 카라측의 주장이다.

요컨대, 이호연 사장이 자리를 비우고나서 dsp의 매니지먼트가 매우 부적절하고 미숙했고, 이것이 이번 계약 해지 소동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변호사측은 “능력 있는 전문적인 소속사를 찾고 있다”고 언급했다.


http://jpnews.kr/8368

  • 토토가 2 열풍으로 인해 재입덕한 팬들과 새로 입덕한 팬들이 점점 증가하고 있으며 네이버 검색창에 입덕만 쳐도 연관 검색어에 '은지원 입덕', '젝스키스 입덕', '젝키 입덕' 등이 나올 정도로 인기 몰이 중이다. 3.5집 수록곡 '커플'은 2016년 5월 6일 뮤직뱅크 케이 차트에 14위로 진입했으며 다음주인 5월 13일에는 3계단 상승한 11위에 올랐다. 또한 2016년 5월 보이그룹 브랜드 평판 빅데이터 분석 결과, 수많은 현역 아이돌들을 제치고 2위에 올랐다.
  • 무도 방영을 전후로 유튜브에 젝키가 출연한 90년대 예능 영상들이 올라왔다. 90년대 중후반에 태어나 젝키를 모르고 산 사람들은 90년대의 예능에 신기해 하고 있으며, 몇몇 신규 팬들은 덕질하려고 봤다가 화질 때문에 놀란다 카더라. 사실상 90년대 후반의 예능 프로그램에 다 나왔다고 해도 무방하다 지금도 유튭에 젝키 치면 다양한 젝키가 나온 예능들을 볼수 있다. 98년도 7월에 방영된 SBS 퍼니퍼니에서 홍진경 가방을 뒤지는 영상까지 있다(...).
  • 2016년 6월 24일 방송된 MBC FM4U ‘정오의 희망곡 김신영입니다’에 룰라 김지현 채리나가 출연했는데, 채리나는 룰라 시절 후배들을 때리고 다닌다는 소문이 났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고 사연을 밝혔다. 채리나는 혼낸 적은 없고 혼난 적은 있다며, 젝스키스 인사를 안 받아준다고 그쪽 대표님인 이호연 사장한테 혼났다고 말했다. 이어 채리나는 “그때 당시 저희가 선배인데 젝스키스가 인사를 건성으로 하더라. 그래서 받아주기 싫었다. 이후에는 친해져서 오해를 풀었다”며 이야기를 훈훈하게 마무리했다.
  • DSP에 1996년 입사후 20년 이상 근무 중인 장진희 이사는, 2012년도 인터뷰에서 입사 초기 모습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시기나 정황상으로 봤을 때 젝스키스의 이야기다.기사

장진희 본부장이 DSP미디어에 입사한 것은 1996년 가을. 지인의 소개로 이 회사 기획 파트에 입사해 사회 첫발을 내디뎠다. 가내수공업 수준을 면치 못했던 당시 연예계에서 기획이라는 근사한 단어는 이내 사라졌다. "일당백이 아니면 회사도 저도 버틸 수 없었어요"라는 당시 그에게 최근 분업화ㆍ산업화ㆍ세계화 등을 거듭하고 있는 최근 연예 기획사의 변화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변변한 숙소가 없던 시절 지방 출신 멤버들 밥을 차려주기 일수였고 컴퓨터가 없던 시절 팬 관리에 마케팅ㆍ정산까지 모두 수기하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스케줄 오갈 때 맞춰서 밥을 해놓으면 그렇게 잘 먹을 수가 없었죠. 저까지 허기를 느낄 정도였으니 말 다했죠. 쌀을 하도 많이 넣어서 밥통이 터진 적이 있을 정도였어요. 아무리 먹어도 배고프다고 아우성이었죠."

온라인 뱅킹이 도입되기 전이라 매일 은행에서 하루를 시작하기도 했다. 매일 가족처럼 사무실에서 마주치다 보니 멤버들은 누나처럼 그를 따랐고 연애상담부터 가족문제까지 시시콜콜하게 회사의 대소사는 그의 손을 거쳐야 했다.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어린 나이부터 가장 노릇을 해야 하는 멤버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면 마음이 숙연해지죠. 한번은 여자친구 선물 포장을 부탁하는 멤버도 있었어요. 워낙 가깝다고 생각한 모양이에요."

"젝키와 클릭비는 변변한 연습실도 없었어요. 연습생의 개념이 없던 시절이라 타고난 재능만 가지고 무대에 오른 경우죠. SS501 데뷔 때부터 오디션의 개념이 생겼어요. 통과한 친구를 전문 트레이너가 붙어 노래ㆍ춤ㆍ연기 같은 걸 훈련을 시켰죠."


http://sports.hankooki.com/lpage/music/201204/sp2012042007015895510.htm

  • 2000년 6월 16일 피자의 아침 방송내용을 보면, 소속사 측은 행사에 있어서는 멤버들에게 70%를 준다고 항변했는데, 젝스키스/정산 문제 문서를 보면 2015년 tvn 택시 방송에서 장수원이 행사 한번에 멤버당 300만원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이를 통해 당시 젝스키스의 1회 행사료를 계산해보면, 2570만원이다. 99년도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S.E.S.가 행사 1회당 1000만원을 받는다고 쓰고 있는데, 이보다 많은 액수다. 당시 대졸신입 월급 평균이 130만원 할때이니, 2570만원은 굉장히 큰 액수다. 오늘날로 치면 7000만원 가량의 가치다. 오늘날 아이돌 중 이 정도 액수를 받는 팀은 찾기 힘들다.
  • 모든 멤버가 데뷔 당시 예명을 쓰지 않은 1세대 남자 아이돌이다.

 


 

정규 앨범
집수 앨범명 활동곡 발매일
1 학원별곡 학원별곡 / 폼생폼사 / 연정 / 배신감 / 기억해줄래 1997년 5월 14일
2 WELCOME TO THE SECHSKIES LAND 기사도 / 탈출 / 말괄량이 길들이기 / 거절의 이유 1997년 11월 1일
3 Road Fighter Road Fighter / 무모한 사랑 / Crying Game 1998년 7월 15일
3.5 SechsKies Special 커플 / 너를 보내며 1998년 10월 30일
4 Com' Back Com' Back / 예감 / 그녀가 남기고 간 선물 / 그대로 멈춰 1999년 9월 9일
5 ANOTHER LIGHT 특별해, 웃어줘 / 느낌이와 / 네가 필요해 / 백허그 / 술끊자 / 현기증 / 다신 / 오랜만이에요 2017년 9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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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T. 프롤로그  (1) 2020.05.02

H.O.T. 프롤로그

2020. 5. 2.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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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H.O.T. 입니다. 키워주세요. "

 

그룹명 H.O.T
High-five OTeenagers
멤버 문희준
( 文熙俊 / 78 / 서울특별시 강남구 / B )


장우혁
( 張佑赫 / 78 / 경상북도 구미시 / O )


토니 안
( 안승호 [安勝浩] / 78 / 서울특별시 용산구 / O )


강타
( 안칠현 [安七炫] / 79 / 경상북도 예천군 / B )


이재원
( 李在元 / 80 / 서울특별시 강동구 / A )
데뷔 1996년 9월 7일
정규 앨범 [We Hate All Kinds of Violence]
활동기간 1996년 9월 7일 ~ 2001년 5월 13일
소속사 SM엔터테인먼트
공식색 하얀색
팬덤 Club H.O.T

 


 

개요

1996년 9월 7일에 SM엔터테인먼트 소속으로 데뷔한 대한민국의 5인조 보이그룹이다.

2001년 5월에 해체되었다가, 2018년 2월에 재결합했다.

데뷔하자마자 신드롬을 일으키면서 1990년대 후반 대한민국 대중가요계를 평정한 전설의 아이돌 그룹으로 중화권 시장까지 사로잡아 한류의 문을 연 그룹이다.

아이돌 그룹 최초로 연간 최다 음반 판매량 달성, 방송 3사 가요대상 그랜드 슬램 달성, 자작곡으로 대상 수상, 국내가수 최초로 잠실 주경기장 공연 매진, 역대 최대 팬클럽 등 전설적인 아이돌답게 수많은 기록을 남겼다.

1996년 9월 7일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에서 첫 데뷔하여 1집 타이틀곡인 학원폭력을 주제로 한 갱스터 랩 '전사의 후예'로 주목을 받았다.

1996년 10월 중순경부터 KBS 가요프로에서 10위권, MBC에서는 4위에 안착했으며 1996년 11월 17일 SBS TV가요20에서는 3위까지 치고 올라왔다.

이어서 후속곡인 '캔디'가 메가히트급으로 대박이 나면서 최정상의 인기를 거머쥐게 되었고, ‘행복’, ‘We are the Future’, ‘열맞춰’, ‘빛’, ‘아이야’ 등을 연이어 히트시키며 90년대 후반을 대표하는 아이돌 그룹으로 자리 잡았다.

 

2020년 현재는 다양한 컨셉의 아이돌 그룹들이 춘추전국시대를 이루고 있지만 1990년대 후반은 그냥 H.O.T.로 10대들이 단결할 수 있을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그나마 유일한 라이벌로 젝스키스가 활동했지만, 실질적인 인기는 H.O.T.의 적수가 될 수 없을 정도로 독보적이었다.

H.O.T.의 대성공으로 한국 대중가요계는 빠른 속도로 아이돌이 주도하는 가요계로 재편됐다.

당장 젝스키스부터가 ‘타도 H.O.T.'를 기반으로 등장한 그룹이다.

그외의 수많은 아이돌 그룹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대중음악을 다루는 프로그램엔 아이돌 그룹들이 거의 점령하게 되었다.

1990년대 후반 대중가요계의 판도를 바꾸는 변화의 시초격이라고 할 수 있는 아이돌 그룹이다.

1987년에 데뷔한 소방차가 한국 아이돌의 태동이었고 1992년에 데뷔한 서태지와 아이들이 대중문화와 가요계의 판도를 바꾼 K-POP의 시발점이라면, H.O.T.는 아이돌 그룹의 정의를 완성하며 본격적인 아이돌 시대를 연 그룹이다.

현재 거의 모든 아이돌 그룹들이 담당하고 있는 구성들인 메인 보컬(강타), 서브보컬(문희준, 토니 안), 래퍼(장우혁, 이재원) 등의 구성이나 성격적/캐릭터적 설정들인 만능 재주꾼 리더(문희준), 대표 비쥬얼(강타), 댄디한 귀공자(토니 안), 쿨한 카리스마(장우혁), 순수한 막내(이재원) 등 현재 아이돌 그룹의 멤버들에게 등장하는 기믹과 컨셉적 역할들을 최초로 완벽히 구현한 그룹이다.

실제로 2집의 수록곡인 Go! H.O.T.! 의 가사에서 멤버들의 이미지를 위트 가이 희준, 섹시 가이 강타, 무드 가이 토니, 와일드 가이 우혁, 샤이 가이 재원이라고 칭했으며 1집 캔디 때부터 멤버 각자에게 고유 번호와 고유 컬러를 부여했다.

 

H.O.T.의 아이돌 그룹의 구성은 나중에 거의 모든 아이돌 그룹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당장 H.O.T.가 데뷔하고 바로 데뷔한 젝스키스, NRG, 신화, god 등 다른 1세대 남성 아이돌 그룹들도 H.O.T.의 영향을 받았다.

 

특히나 당시 아이돌 업계에서 나름 선구자였던 DSP의 이호연 사장은 H.O.T.의 성공을 보고 급하게 듀엣에서 6인조 그룹으로 노선을 수정해 젝스키스를 데뷔시켰다.

 

평가

1990년대 후반만 해도 가요계에서 '아이돌'이란 단어조차 생소하였다. 당시에는 '아이돌'보다는 '고교생 그룹', '하이틴 스타', '10대들의 우상' 등으로 불렸다.

그중에서도 한국형 아이돌의 시초이자 얼굴격이었던 H.O.T.는 언론과 평론가들의 관심을 집중적으로 받았다. “10대들은 왜 이들에게 열광하는가”라는 제목으로 이들의 인기요인을 분석하는 칼럼이나 뉴스 보도도 등장하였다.

부정적인 평가로는, ‘기획사의 철저한 전략으로 만들어진 상품이다’, ‘10대 청소년들이 상업적으로 이용되는 것이 아닌가 염려가 된다’, '외양에 치중되어 있다', ‘기획사에서 만들어주는 음악을 한다.’등이 주요 비판 내용이었다.

한 방송사에서는 학업에 충실해야할 학생들이 돈벌이에 이용돼서는 안된다며 고교생 가수의 출연을 금지한다는 방침을 발표해 논란을 빚기도 했다.기사그랬던 방송사가 이제는 ‘더유닛’이라는 아이돌 육성 프로그램을 만들었으니 세상 참 많이 변했다

H.O.T.의 대성공으로 아이돌 그룹들이 가요계를 장악하게 되자 성인층 가수들의 설 자리가 없다는 비판도 많았다.

하지만, 성인층 가수들이 설 자리가 없어진 실질적인 이유는 H.O.T.가 데뷔하기 이전부터 서태지와 아이들의 데뷔 이후에 한국 대중가요계의 판도가 변했기 때문이다.

긍정적인 분석도 있었다. 라디오 음악PD들이 집필한 <에쵸티 즐거운 반항>이란 책에서는 이들의 인기요인을 ‘차별화와 일체화’ (각기 개성이 뚜렷한 멤버구성으로 ‘다름’을 내세우면서도 집단 유행에 뒤쳐지지 않는 10대들의 특성을 충족), ‘재빠른 변신’ (곡마다 달라지는 빠른 컨셉 변화로 급변하는 젊은이들의 취향에 기민하게 대응), ‘착한 이미지’(H.O.T.에 열광하는 자녀들을 걱정하는 부모들을 안심시키고 좋아해도 무해하다고 허락하게끔 만든 모범생 이미지)라고 분석하였고 이전까지 이런 지위를 누린 가수는 없었다고 평하였다.

데뷔 초반에 들었던 여러 비판들이 채찍질이 되었던 것인지 H.O.T.는 해마다 성장해갔다.

안무는 처음부터 문희준 장우혁이 거의 다 만들었고, 랩과 가창력도 앨범을 낼 때 마다 발전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 멤버들은 데뷔 초부터 스스로 작곡 공부를 하였고 3집부터 멤버 전원이 앨범에 자작곡을 싣기 시작했는데 작사, 작곡에 더불어 편곡까지 직접 하면서 음악에 더욱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5집에 이르러서는 앨범의 전곡을 멤버들의 자작곡으로 채우고 올 프로듀싱을 하였는데, 이는 아이돌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타이틀곡이나 후속곡도 자작곡으로 활동하였다.

 

영향과 파급 효과

당시 영세 기획사였던 SM엔터테인먼트를 한국 최고의 기획사로 키워낸 그룹으로, 서태지와 아이들의 혜성같은 등장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10대 팬덤을 타켓으로한 기획형 아이돌의 시작이다. 이때부터 대형기획사가 철저하게 사전분석하고 조립한 아이돌의 댄스뮤직이 대중문화를 석권하고 한류의 시작이 된다.

이 때 중화권에서의 인기도 엄청나서, 1998년 한국가수 최초로 중국에서 음반발매를 하였으며 한류현상의 시초가 된다. 2000년초에는 중국에서 한국가수 최초로 베이징단독콘서트를 개최하였고 중국언론에선 한류가 몰아치고 있다고 보도했다. 관련기사 인기의 영향으로 중국에서 한국상품들이 특수를 누리기도 했다.기사 2000년말에는 중국에서 농심의 광고모델을 하였으며영상 '당대가단'이라는 중국음악잡지에서 해외인기가수 순위 1위를 장기간 유지할 정도로 인기가 상당했다.기사 중국 언론과 매체에서는 한국은 김치와 H.O.T.의 나라라고 소개하기도 하였으며 당시 중국의 H.O.T. 팬 수가 800만명이었다는 설이 있을 정도였다.

따로 활동하지 않던 일본이나 북미와 유럽권에서도 매니아층이 있었으며, 미국 MTV VMA에서는 1999년에 'international viewer's choice'라는 부문에서 H.O.T.의 '열맞춰' MV가 수상하였다. 관련기사

해체 후에도 jtL이나 솔로 활동으로 중화권을 비롯해 인도, 싱가폴, 베트남 등 아시아 전역에서 인기를 누리며 오늘날 글로벌한 KPOP 인기의 기반을 닦게된다. 

 

<시사저널>에서 발표한 문화 • 스포츠인 영향력 순위에서 1999년 2000년에 연달아 순위에 들었으며, 특히 1999년은 배우, 가수를 통틀어 연예인 중에서는 가장 높은 순위를 차지하였고 아이돌 그룹 최초로 문화 • 연예인 부문 1위를 차지했다.

음반판매량은 1집 100만장으로 시작해서 2집이 150만장, 3집이 110만장에 4집 138만장, 5집 88만장으로 네 개의 밀리언셀러 앨범 기록을 세웠다.

“돌멩이에 H.O.T.이름만 새겨도 팔린다.”는 말이 생길정도로 H.O.T.관련 상품들이 불티나게 팔렸다. 1집 캔디 무대에서 착용했던 장갑, 가방, 모자, 먼지인형집게 등을 착용한 학생들을 길거리에서 쉽게 볼 수 있었다. 그외에도 H.O.T. 사진이 들어간 공책, 지우개, 편지지, 저금통 등 온갖 학용품과 팬시상품들이 팔렸다. 

1999년에는 H.O.T.자서전도 출간되었다. 출간 열흘만에 20만권이 팔려 역사상 최단 기록으로 베스트셀러 1위를 달성하며 화제가 되었다. 

한불 화장품과 손을 잡고 H.O.T. 향수도 발매하였는데 출시 이틀만에 10만개가 매진되었다. 이 무렵엔 DNA 목걸이도 판매되었다.

H.O.T. 캐릭터를 그려넣은 ‘틱톡에쵸티’라는 음료수도 발매되었다. 출시 5개월만에 4500만캔이 팔려 폭발적인 판매량으로 당시 음료업계 1위였던 코카콜라의 판매량을 앞질렀다. H.O.T.세대라면 소풍 날 이 음료수를 마셔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2000년엔 H.O.T.를 모델로 기용한 르까프 나이키를 누르고 동종 업계 1위에 오르는 이변을 일으켜 주목을 받기도 했다.

 

나이키는 국내 진출 후 5년이 넘게 1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국내 토종 브랜드 르까프가 H.O.T.를 모델로 기용한 후 5개월만에 이를 따라잡고 1위에 오르는 기록을 만들어낸 것이다. 르까프 측은 당연히 계약 연장을 원했으나 이후 H.O.T.가 바로 해체를 해 재계약을 할 수 없었다.

2000년엔 '평화의 시대'라는 한일합작 3D입체 영화에도 출연했는데 흑역사 흥행 실적 약 2만4천이라는 성과로 묻혔다. 보다 보면 정말 열심히 연기하는 멤버들이 불쌍할 지경. 아이러니하게도 멤버들이 프로듀싱한 평화의 시대의 OST 음반은 30만장이 팔렸다고 한다.

 

1998년, IMF외환위기에 해외관광객 유치를 위한 국가홍보CF에 대중음악 보이그룹으로는 유일하게 출연하였다. 해당영상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97년 대선후보 시절에도 좋아하는 가수로 H.O.T.를 꼽았고기사참조, 1998년 10월에는 H.O.T.를 청와대에 초청하여 오찬을 함께하였다. 오찬 소감 영상(30초 부터)

그 외에도 당시 해외가수에게만 대관되던 잠실주경기장에서 최초로 단독콘서트를 한 국내가수이며 콘서트를 이유로 지하철 막차 시간을 바꾸고 교육청에서 조퇴금지령을 내린 가수였다. 그리고 조용필 다음으로 많은 잠실주경기장 단독콘서트를 한 가수이기도 하다.

2018년 10월 13일~14일에 행해진 재결합 콘서트의 영향으로 명절보다 더 많은 인원이 기차를 이용하여 SRT이용객 수 최고치를 경신하였다. 기사참조

 

수상 경력

최전성기의 시작이었던 1997년도에는 아이돌 그룹으로서는 최초로 음반판매량 1위를 기록해 골든디스크 시상식 대상을 수상했으며 그에 더해 MBC 한국가요제전, SBS 가요대전, 서울가요대상, KMTV 가요대전 대상을 수상하였다.

최전성기의 정점이었던 1998년도에는 당시 방송 3사 모든 연말 가요프로에서 대상을 수상하여 아이돌 그룹으로서는 사상 최초로 그랜드슬램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그에 더해 서울가요대상에서도 젝스키스와 함께 공동으로 대상을 수상하였다.

 

재결합

2014년 11월 무한도전 토토가에서 H.O.T.의 섭외를 위해 강타가 출연했는데, 강타는 H.O.T.의 재결합을 조심스럽게 보고 있는 시각이 비춰졌고 결국 토토가 출연은 불발되었다.

하지만 토토가 본편에서 무한도전 멤버들이 H.O.T. 코스프레를 하였고 이후 토토가에 출연했으면 싶은 가수 설문조사에서 H.O.T.가 1위로 뽑히기도 하였다.

꾸준히 제기되던 재결합설이 2016년 데뷔 20주년을 맞아 구체적으로 언급된 바 있다.

특히 2016년 4월, 당시 라이벌이었던 젝스키스가 무한도전 토토가2 - 젝스키스를 통해 재결합을 공식화함에 따라 H.O.T. 재결합에 대한 관심과 기대도 증가하게 된다.

또한 토토가2 - 젝스키스 말미에 유재석과 하하가 토토가 3를 예고했던 장면을 통해 사실상의 최유력 후보로도 거론되었던 상황이었고, 멤버들과 이수만 프로듀서가 비밀리에 회동을 가졌다는 기사를 통해 더욱 기대감을 증폭시켰다.

이후 재결합에 관한 구체적인 논의는 거의 90%까지 진행되었으나 최종적인 협의 과정에서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는 것이 내부 측의 주장.

이로 인해 그동안 소문만 무성하게 나돌았던 20주년 프로젝트는 오랜 설왕설래 끝에 무산되고 만다.

이후 라디오 스타 젝스키스 편에서 김구라가 H.O.T. 재결합 무산의 원인이 어느 한 명에게 있다는 찌라시를 폭로한 이후 대다수는 여러 정황상 장우혁일 것이라 추측하기도 했으나 장우혁은 방송을 통해 수차레에 걸쳐 의혹을 일축한 바 있다.

15년 동안 빈번하게 논의와 무산을 거듭해온 재결합설과 문희준의 결혼에서 비롯된 일련의 사건으로 인한 팬덤 내 갈등이 팽배했던 가운데 2018년 1월 23일, 무한도전의 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 시즌 3 기획 차 멤버 전원이 회동을 열었다는 공식입장을 발표하였고 6일 뒤, 마침내 토토가3 - H.O.T.의 방송이 확정되었다.

그리고 토토가에서 말했던 팀원들과의 상의 끝에 17년만의 재결합 콘서트가 확정되었다.

해당 콘서트의 정식 명칭은 FOREVER HIGH-FIVE OF TEENAGERS이다.

본래는 팀 이름을 따서 그대로 FOREVER H.O.T.로 정해졌으나 현재 상표권 문제로 자신들의 영어 약자를 풀어서 표기했다.

다만 해당 표기도 팀명의 상표권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 콘서트 명칭이 바뀌자마자 이 풀어서 표기한 명칭에 대해서도 상표권 출원을 시도하면서 향후 팀명과 관련한 상표권 분쟁이 발발할 가능성이 커지게 되었다.

2018년 10월 13일과 10월 14일, 무한도전 토토가에 이어, 양일간 잠실 주경기장에서 콘서트를 개최했다.

그리고 2019년 9월 20일 ~ 22일 3일간 고척돔에서 단독 콘서트가 개최되었다.

작년 2018년 콘서트의 #NEXT_MESSAGE2019 떡밥은 이 콘서트였던 것.

해당 콘서트까지가 공연 기획사와 계약한 회차였다고 하므로 2020년에도 이들을 볼 수 있을지 주목된다.

다만 2018년 콘서트에 이어 2019년 콘서트에서도 계속해서 기존 앨범 수록곡과 솔로 신곡으로 콘서트를 진행하였는데, 멤버들도 향후를 생각하면 당연히 그룹 신곡을 내야 한다는 대전제에 대해 공감하고 있으나 여러 가지 사정상 신곡을 내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2019년 콘서트에서는 기존에 단체 안무를 단 한 번도 공개한 적 없는 Do or Die의 안무를 신규 레퍼토리로 선보여 팬들의 아쉬운 마음을 대신했다.

하지만 아직 무대를 보지 못한 그룹 수록곡들과 솔로곡들도 매우 많고 그저 콘서트만 해줘도 감지덕지라는 팬들도 많다.

 

2019년 콘서트 이후로는 개인활동 위주로 활동하고 있다. 2020년 11월 MBC 예능 <안싸우면 다행이야>에 문희준과 토니 안이 함께 출연하였다. 2021년 1월 1일 토니 안의 인스타그램 라이브에서 콘서트를 해달라는 팬들의 요청에 '나도 콘서트 진짜 하고 싶다. 우리 멤버들도 다 하고싶어하는데...'라고 응답했다. 2021년 3월 7일 SBS전설의 무대 아카이브K에 강타, 이재원을 제외한 나머지 멤버들이 출연하였다.

 


 

정규 앨범
집수 앨범명 활동곡 발매일
1 We Hate All Kinds of Violence 전사의 후예 / 캔디 1996년 9월 7일
2 Wolf and Sheep 늑대와 양 / 행복 / We Are The Future 19977월 5일
3 Resurrection 열맞춰 / 빛 19989월 25일
4 I Yah! 아이야! / 투지 / 환희 19999월 15일
5 Outside Castle Outside Castle / 그래! 그렇게 200010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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