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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보이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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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d 지오디 프롤로그

2020. 5. 9. 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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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d 로고

 

그룹명

god
지오디

(groove over dose)

멤버

박준형

( 朴俊炯 / 69 /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 B )

 

윤계상

( 尹啓相 / 78 / 서울특별시 송파구 / O )
(2004년 11월 탈퇴, 2014년 5월 복귀)

 

데니 안

( 안신원 [安信源] / 78 / 미국 워싱턴 주 시애틀 / O )

 

손호영

( 孫昊永 / 80 / 미국 뉴저지 주 / O )

 

김태우

( 金太優 / 81 / 경상북도 구미시 / B )

데뷔

1999년 1월 13일

정규 앨범 <Chapter 1>

활동기간

1999년 1월 13일 ~ 2005년 10월 28일

2014년 7월 8일 ~ 현재

소속사

싸이더스HQ (1999년 ~ 2003년, 2014년 ~ 현재)

JYP엔터테인먼트 (2004년 ~ 2005년)

공식색 하늘색
팬덤 fan god

 


 

1999년 1월 13일에 싸이더스HQ 소속으로 데뷔한 대한민국의 5인조 보이그룹이다.

6집부터 JYP 엔터테인먼트와 계약하게 된다.

2014년 5월 8일 완전체로 컴백하면서 첫 소속사인 싸이더스HQ 소속으로 컴백하게 되었다.

당시 신비주의 콘셉트가 난무하던 시절, 평범한 청년 컨셉으로 편안함으로 다가와 아이돌 최초의 국민그룹이라고 해도 이상할게 없을 정도로 기존 아이돌 주 소비층인 10대를 포함, 전연령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던 그룹이다.

2000년 3집 음반 184만장, 2001년 4집 음반 171만장 이상을 판매하고, 방송 3사 가요대상을 수상하는 등 국민그룹으로 불리며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100일간의 휴먼 콘서트'라는 타이틀에 매일 다른 주제로 구성된 콘서트 100회를 전회 매진시키며 성공적으로 끝마쳐 공연계의 한 획을 긋기도 했다.

데뷔 당시 5인조였던 god는 2004년 윤계상의 탈퇴이후 나머지 네명이 4인조로 활동을 계속했으나 2005년 발매한 7집 ‘하늘 속으로’를 마지막으로 활동을 잠정 중단하고 멤버들은 개인활동을 시작했다.

2014년 5월 탈퇴했던 윤계상을 포함하여 9년만에 5명으로 싱글 《미운오리새끼》를 발매했다.

5월 8일 음원 공개 직후 멜론, 엠넷닷컴, 올레뮤직, 네이버뮤직, 소리바다, 지니, 벅스, 싸이월드뮤직, 몽키3 등 9개 음원 차트 1위를 석권했다.

7월 1일, 3집 '하늘색 풍선'에 이은 또 다른 팬송 '하늘색 약속'을 발표하여, 각종 음원차트 1위에 올랐고, 7월 8일 공개한 정규 8집 수록곡들은 각종 음원차트에서 줄세우기에 성공했다.

팬클럽 이름은 fan god 약칭으로 팬지라고도 불린다.

상징색은 하늘색이고 공식물품은 하늘색 풍선과 파란색 야광봉이다.

다른 아이돌과는 달리 멤버 중 만 29세(30세가 되는해)로 데뷔를 하게된 박준형이 있었다.

갓 데뷔한 아이돌 치고는 꽤나 고령인 셈.

여담으로 멤버 전원이 집안의 막내며 누나가 있다. 손호영은 여태껏 프로필에 1남 1녀 중 둘째로 알려져왔으나 이복 여동생이 있으며, 아버지 쪽으로만 따지면 사실상 1남 2녀중 둘째다. 하지만 함께 같이 살지도 않았고, 손호영 본인도 언론에서 '1남 1녀중 막내'라고 했다.

그룹명의 이름인 god는 groove over dose를 줄인 것이다.

 

전성기에는 지상파, 케이블 안가르고 상을 쓸어 담다시피 했고, 2014년 8집 발매 후 멜론뮤직어워드에서 대상 중 하나인 베스트 앨범상 수상.


2000년에는 그 절정의 전성기를 달리던 조성모를 제치고 KBS 가요대상을 수상했고, 2001년에는 SBS, KBS, MBC 지상파 3사 대상을 한 해에 모두 수상하고 그에 더해 골든디스크 시상식 대상과 엠넷 뮤직비디오 페스티벌에서도 대상에 해당하는 최고 인기 뮤직비디오상을 수상하며 크리플 크라운과 그랜드슬램을 동시에 달성하였다.

이때 유일하게 수상을 하지 못한 시상식은 서울가요대상 하나뿐이다.

 


 

정규 앨범
집수 앨범명 활동곡 발매일
1 Chapter 1

어머님께

관찰

1999년 1월 13일
2 Chapter 2

사랑해 그리고 기억해

애수(哀愁)

1999년 11월 25일
3 Chapter 3

니가 필요해

거짓말

촛불하나

2000년 11월 3일
4 Chapter 4

니가 있어야 할 곳

2001년 11월 15일
5 Chapter 5 Letter

편지

0%

2002년 12월 17일
6 보통날 보통날 2004년 12월 9일
7 하늘속으로

하늘속으로

2♡

2005년 10월 20일
8 Chapter 8

하늘색 약속

Saturday Night

2014년 7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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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신기 프롤로그  (1) 2020.05.09

신화 프롤로그

2020. 5. 8.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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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 로고

" 혜성처럼 전진하는 우리는 신화입니다! "

 

그룹명

SHINHWA
신화

멤버

에릭

( 문정혁 [文晸赫] / 79 / 서울특별시 강남구 / B )

 

이민우

( 李珉雨 / 79 / 전라북도 남원시 인월면 / A )

 

김동완

( 金烔完 / 79 / 서울특별시 강남구 / O )

 

신혜성

( 정필교 [鄭弼教] / 79 / 서울특별시 강북구 / A )

 

전진

( 박충재 [朴忠裁] / 80 / 서울특별시 강동구 / B )

 

앤디

( 이선호 [李先鎬] / 81 /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 O )

데뷔

1998년 5월 9일

정규 앨범 <해결사>

활동기간 1998년 3월 24일 ~ 현재
소속사

SM엔터테인먼트 (1998년 ~ 2003년)
GOOD EMG (2003년 ~ 2011년)

신화컴퍼니 (2011년 ~ 현재)

공식색 주황색
팬덤 신화창조

 


 

1998년 3월 24일에 SM엔터테인먼트 소속으로 데뷔한 대한민국의 6인조 보이그룹이다.

그룹명은 신화(Mythology)에서 유래되었다.

1998년 SM엔터테인먼트에서 데뷔하였고, 2004년 굿엔터테인먼트로 이적하였다가 2011년 본인들이 직접 신화컴퍼니를 설립하였다.

데뷔 이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룹의 해체나 멤버의 탈퇴 및 교체가 없었던 국내 최장수 아이돌 그룹.

2017년 기준으로 13장의 정규앨범과 7장의 비정규앨범을 발표하여 대한민국 댄스 그룹 최다 정규앨범 발매 기록을 수립하였다.

1999년부터 인기를 모으기 시작했고, 최전성기로 간주되는 기간은 2001년부터 2005년까지이다.

1990년대 후반에 전성기를 맞았던 H.O.T.와 젝스키스는 1세대 선발주자로, 2000년대 초반에 전성기를 맞았던 신화와 god는 1세대 후발주자로 구분된다.

H.O.T.의 영향으로 신비주의 미소년이 주류이던 1대 아이돌 붐 시장에서 신화는 유일하게 강한 남성미, 탈신비주의, 화려한 댄스 음악 등을 내세우며 차별화에 성공하였다.

1세대 아이돌 그룹의 수명은 3 ~ 5년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신화는 2004년 데뷔 7년차에 가요대상을 수상하며 최전성기를 맞았으며, 지난 20년 동안 1집을 제외한 15개의 모든 활동곡이 음악방송에서 1위를 거두었다.

또한 서울올림픽주경기장에서 단독 콘서트를 열 수 있었던 몇 안되는 국내 가수이며, 첫 단독 콘서트, 10주년 기념 콘서트, 20주년 기념 콘서트를 모두 올림픽체조경기장에서 치렀다.

'따로 또 같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돌 개인 활동의 보편화를 이끈 그룹이다.

그룹 활동과 개인 활동을 병행한 최초의 아이돌 그룹이자 개인활동으로 대박을 친 몇 안되는 아이돌 그룹.

아이돌 그룹 멤버의 개인 활동이 용인되지 않던 시절 일찍이 멤버 개개인이 솔로 음반, 예능, 드라마, 광고 등 다양한 연예 분야에 도전해 성공을 거두었고, 2000년대 중반에는 방송만 틀면 신화 멤버가 나온다는 소리를 들었을 정도로 왕성한 미디어 활동을 보였다.

트렌드에 절대 뒤쳐지지 않으면서도 신화만의 음악적 색깔을 잃지 않는 것이 강점.

신화를 대표하는 장르는 화려한 사운드의 댄스 음악으로, 댄스를 유독 부각했던 1세대 아이돌 그룹 중에서도 퍼포먼스로 가장 유명하다.

퍼포먼스 측면에서 높은 완성도와 이색적인 시도로 좋은 평가를 받아왔을 뿐만 아니라, 댄스 음악을 하는 그룹도 장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모범적인 사례이다.

 

장수

2020년 기준으로 데뷔 22 주년을 맞은 국내 최장수 아이돌 그룹이다.

게다가 데뷔 이후 한 번도 해체나 멤버의 탈퇴 및 교체 없이 끈끈한 의리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더더욱 주목받고 있다. 아이돌계의 살아있는 전설.

신화가 데뷔했을 당시 1990년대 후반은 아이돌의 평균 수명이 3~5년에 지나지 않았고 덕분에 5년차 징크스라는 말까지 있었다.

때문에 SM엔터테인먼트 역시 신화를 해체시킨 후 솔로로 계약할 생각이었으나, 신화는 함께 일하던 스텝들을 데리고 다 같이 소속사를 이적하며 그룹을 보존했다.

2000년대 초중반 당시는 매너리즘과 불법 음원 범람, 그리고 소몰이창법 발라드 위주로의 가요계 개편으로 인해 1세대 아이돌들이 지독한 침체기를 겪던 시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신화는 아이돌계의 징크스를 깨고 2004년 7집으로 대상을 수상하며 데뷔 7년차에 제 2의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7년차에 전성기를 맞기는 커녕 7년차인 아이돌 그룹 자체가 극히 드물었다는걸 생각하면 대단한 일.

신화가 데뷔했을 당시는 아이돌 평균 수명이 짧았기 때문에 신화는 10년도 더 전부터 '장수 아이돌', '중견 아이돌'이라는 타이틀을 달게 되었다. 아이돌계 최고참으로 활동한 기간이 아닌 기간보다 더 많은 셈.

한국 아이돌 최초 정규 6집 활동이라는 타이틀이 붙었던 <너의 결혼식> 활동 시절, 신화는 당시 평균나이가 고작 24.5세에 불과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나이 때문에 춤출 때 힘들지 않느냐?"라는 질문을 받았다.

그 정도로 이 당시 아이돌이란 20대 초반 이하의 어린 친구들이 몇 년 바짝 하고 빠지는 직업이었고 20대 중반도 거의 찾기 힘들었다. 서른이 넘은 현역 아이돌들도 많은 지금으로써는 상상하기 힘든 일.

그렇기에 신화는 더더욱 연예계에서 변종으로 여겨졌고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군복무로 인한 공백기 4년을 제외하면 그룹 활동을 2년 이상 쉬었던 적이 단 한번도 없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실. 평균 앨범 발매 텀은 대략 1년 반 정도다.

한창 빡세게 활동하던 1~6집 시기에는 1년에 한장 꼴로 앨범을 발매했고, SM엔터테인먼트를 나온 이후 7집부터는 그룹활동과 개인활동을 병행하며 앨범 발매의 텀이 길어졌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백기가 2년 이상을 넘어간 적이 단 한번도 없다.

심지어 활동이 뜸하다고 원성이 자자했던 시기인 2005년~2008년 조차도 8집은 1년 9개월, 9집은 1년 10개월만에 발매되었기 때문에 평소와 비교해 그다지 긴 텀도 아니었다.

최근 아이돌 그룹들과 가요계의 동향을 보았을 때 굉장히 이례적인 사례로, 데뷔 20년차 베테랑인 신화가 싱글도 미니앨범도 아닌 정규앨범을 1~2년마다 꼬박꼬박 발매한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행보라고 볼 수 있다.

그만큼 멤버들 모두 무조건 개인 활동보다 그룹 활동을 무조건 우선시한다.

활동부터 음반 제작까지 멤버들이 최종적으로 책임을 지다보니 준비 기간이 길고, 이 때문에 정규 앨범 활동 최소 1년 전에 멤버들끼리 모여 플랜을 짜놓는다.

그룹 활동을 우선하여 플랜을 짠 후 남는 시간에 개인활동 플랜을 짠다고 한다.

배우 활동을 병행하고 있는 에릭과 김동완의 경우 신화 활동에 조금이라도 방해가 될 것 같으면 먼저 들어오는 시나리오는 읽어보지도 않는다고 한다.

다만 <연애의 발견> 시나리오가 들어왔을 때는 에릭이 멤버들에게 '~한 시나리오가 들어왔다'라고 말을 꺼내자 멤버들이 오히려 무조건 하라며 계속 등을 떠밀었고 신화 활동을 예정보다 뒤로 미뤘다고 한다.

신화가 얼마나 오랫동안 활동했는지 설명하자면 H.O.T., 젝스키스 다음으로 데뷔하여 god와 동시기에 활동하였고, 동방신기가 막 데뷔해 신인상을 휩쓸때 가요대상을 받았고, 샤이니와 같은 테이블에 앉아서 골든디스크 본상을 수상을 하였고, EXO를 2013년 MAMA에서 투표로 이겼다.

심지어 이제는 1998년 신화가 데뷔했을 당시 태어난 아이들이 아이돌 후배들이 되었다.

게다가 이 친구들이 2017년 기준으로 성인이 된다. 신화가 데뷔할 때 태어난 아이들도 어느덧 성인이 된 것이다.

심지어 이제는 2002년 신화가 5집을 발표한 해에 태어난 지성(NCT), 사무엘(가수), 유선호 등이 현역 아이돌로 데뷔해서 활동 중이다. 이제는 신화 최전성기에 태어난 아이돌 막내가 활동중이다.

또한 신화가 활동한 시기에만 5개의 정권이 들어섰다. 활동 중 2번째 정권을 맞이하기도 전에 해체하거나, 2번째 정권을 맞이해도 얼마 지나지 않아 해체하는 아이돌 그룹들이 많이 있다는걸 생각하면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순서대로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1998~2003) → 노무현 전 대통령의 참여정부(2003~2008) → 이명박 전 대통령의 이명박 정부(2008~2013) → 박근혜 전 대통령의 박근혜 정부(2013~2017) 이다. 그리고 2017년 5월 10일 문재인 후보가 19대 대통령으로 당선됨으로서 신화는 활동 중 5번째 정권을 맞이하게 되었다.

덤으로 북한에서도 김정일에서 김정은으로 정권이 교체되었다.

아이돌룸에서도 이것을 언급하며 이제는 통일을 바라본다는 말까지 나왔다.

 


 

정규 앨범
집수 앨범명 활동곡 발매일
1 해결사 해결사 / 으쌰!으쌰! / 천일유혼 1998년 5월 9일
2 T.O.P(Twinkling of Paradise) T.O.P(Twinkling of Paradise) / YO! (악동보고서) 1999년 4월 15
3 Only One Only One / All Your Dreams / Wedding March (너의 곁에서 II) 2000년 5월 27일
4 Hey, Come On! Hey, Come On! / Wild Eyes 2001년 6월 28일
5 Perfect Man Perfect Man / I Pray 4 U 2002년 3월 29일
6 너의 결혼식(Wedding) 너의 결혼식 / 중독 2002년 12월 27일
7 Brand New Angel / Brand New / 열병 (Crazy) / Oh! /  2gether 4ever 2004년 8월 27일
8 State of the Art Once In A Lifetime / Throw My Fist / You`re My Everything 2006년 5월 11
9 10th Anniversary - RUN RUN 2008년 4월 2일
10 The Return Venus 2012년 3월 23일
11 The Classic This Love 2013년 5월 16일
12 We 표적 / Memory 2015년 2월 26일
13 Unchanging Part 1 - Orange 오렌지 (Orange) 2016년 11월 29일
Unchanging - TOUCH TOUCH 2017년 1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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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RG 엔알지 프롤로그  (0) 2020.05.08

NRG 엔알지 프롤로그

2020. 5. 8.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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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RG 로고
과거 5인조 NRG
현재 3인조 NRG

 

그룹명

NRG
엔알지

(New Radiancy Group)

前 멤버 故 김환성
( 金煥城 / 81~00 / 2000년 6월 15일 사망 )

문성훈
( 文成焄 / 80 / 2005년 10월 탈퇴 )
멤버

이성진

( 李成真 / 77 / 서울특별시 / A )

( 1999년 8월 탈퇴 ~ 2001년 6월 재합류 )

 

천명훈

( 千明勛 / 78 / 서울특별시 강동구 / O )

( 1999년 8월 탈퇴 ~ 2001년 6월 재합류 )

 

노유민

( 魯維民 / 80 / 서울특별시 종로 / A )

데뷔

1997년 11월 1일

정규 앨범 <New Radiancy Group>

활동기간

1997년 10월 28일 ~ 현재

 

1997년 11월 1일 ~ 2005년 11월 22일

2017년 10월 28일 ~ 현재

소속사 뮤직팩토리
공식색 분홍색
팬덤 千載一遇 (천재일우)

 


 

1997년 10월 28일에 데뷔한 대한민국의 보이그룹이다.

1996년 이성진, 천명훈의 듀오로 데뷔한 '하모하모'에 멤버가 추가되면서 이름 역시 교체된 것이다.

소방차의 멤버 정원관과 김태형이 함께 프로듀싱했다.

NRG의 뜻은 'New Radiancy Group' 즉, '새롭게 빛나는 찬란한 그룹'이다. NoRaGo노라조 아니다. 누룽지도 아니다.

공식 팬클럽의 이름은 '천재일우' 이고, 상징색은 분홍색, NRG가 쓰인 길다란 분홍색 풍선과 NRG와 千載一遇가 쓰인 분홍색 우비를 응원 물품으로 사용했다.

 

NRG는 무대에서 활발한 멤버간의 동선 이동, 덤블링, 격한 안무, 미소년의 이미지, 병맛 같은 뮤직비디오 등으로 유명했다.

 

1집 앨범의 <할 수 있어>가 2위를 했고, 2집 앨범의 <사랑 만들기>가 40만장이 팔려 1위 후보를 통보받았으나 NRG가 1위 후보로 올랐을 때 하필 IMF가 터져서 음악방송 순위 제도가 사라지는 바람에 1위를 하지 못했다.

이후로 김환성은 항상 소원을 묻는 인터뷰에서 소원이 음악방송 1위라고 말했다.

게다가 이 시점부터 아이돌 방송 복장 규제가 강화되어 김환성은 종종 가발을 쓰고 무대에 오르곤 했다.

데뷔 초(1 ~ 2집)에는 Hi-NRG 장르를 하는 그룹이라고 활동했지만 실제로는 90년대 일본에서 인기가 있었던 유로비트 장르 음악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유로비트는 하이에너지의 영향을 받은 장르이기는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두 장르는 별개의 장르다.

NRG는 격한 퍼포먼스와 고난이도 춤을 전 멤버가 소화해서 화제가 되었고 이런 격한 퍼포먼스 덕에 중국에서 컬쳐쇼크 급의 큰 인기를 얻었다.

당시 H.O.T.나 젝스키스만큼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특히 이성진의 뛰어난 예능감 덕분에 각종 쇼 오락 프로그램에도 자주 출연했다. 쉽게 비유하자면 H.O.T.와 젝스키스가 1군이라면 NRG는 1.5군인 셈.

 

1999년 8월 말, NRG는 기자회견을 통해 천명훈과 이성진이 탈퇴한다고 발표했다.

기자회견에서 이성진은 "팀 불화가 아닌 명훈이와 저의 자진 탈퇴"라고 진술했고 , 3집은 문성훈, 노유민, 김환성의 3인 체제로 활동하였다.

NRG 비주얼 유닛 사실 데뷔 초부터 소속사에서는 형들보다 어린 멤버들 위주로 푸쉬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NRG의 인기를 끌어올린 건 리더 이성진이었고, 결국 3집 앨범은 두 리더의 부재가 음반 성적의 부진으로까지 이어졌다.

이후 천명훈이 탈퇴의 전말에 관하여 해명했는데, 2집 <사랑만들기>로 활동하던 당시 무대 의상이 땀복이라 멤버들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어서 이성진과 함께 가서 사장님께 의상 교체를 몇 번 요구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고 한다.

이에 화난 천명훈은 그 자리에서 고가의 의상을 찢어버렸고, 소속사 사장은 이를 빌미로 이성진과 천명훈을 강퇴시켰다.

그런데 기자회견에서는 논란을 방지하고자 '자진탈퇴'로 진술했던 것.

이후로 천명훈은 음악 공부를, 이성진은 Mnet 핫라인스쿨에서 VJ로 활동하기도 했다.

탈퇴했다고는 하지만 그 후로도 김환성이 이성진에게 전화를 시도때도 없이 거는 식으로 멤버들끼리는 여전히 가깝게 지냈다.

 

김환성의 사망 이후 탈퇴했던 이성진과 천명훈이 재합류하여 북경에서 추모콘서트(For Antonio)를 열고 약 1년간의 공백기를 가진 뒤, 2001년 6월, 타이틀 곡 <비(悲)>를 내세운 4집으로 음반 활동을 재개한다.

김환성을 기억하는 추모 앨범 형식이었으며 타이틀 곡은 강타가 직접 작사, 작곡했다.

이 때부터 천명훈이 작곡한 곡이 들어가면서 NRG의 전체적인 컨셉이 바뀌기 시작한다.

이후 NRG의 업적은 이성진이 절반 이상을 쌓아 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는 멤버를 잃고 무너져가는 NRG를 다시 살리기 위해 개인 활동을 시작하면서 그간 쌓아온 미소년 이미지를 과감히 버리고 이때부터 '주접쟁이' 이미지를 선보이며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정규 앨범
집수 앨범명 타이틀곡 발매일
1 New Radiancy Group 할 수 있어 1997년 11월 1일
2 Race Messenger 1998년 8월 7일
3 NRG 003 Face 1999년 11월 4일
4 悲 Sorrow 비(悲) 2001년 6월 5일
5 Hit Song Hit Song 2003년 2월 7일
5집 리패키지 New Radiancy Group 05 2003년 8월 14일
6 NR6G 대한건아 만세 2004년 4월 30일
7 One of Five: 따로 또 같이 별책부록 2005년 11월 22일
20주년 기념 20세기 Night 20th 세기 Night (20세기 나이트) 2017년 10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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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 프롤로그  (0) 2020.05.08

젝스키스 프롤로그

2020. 5. 2.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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젝스키스 로고
1997년 ~ 2000년 (고지용 포함 6인)
2016년 ~ 2018년 (강성훈 포함 5인)
2019년 ~ 현재 (강성훈 제명)

 

그룹명 Sechs Kies
젝스키스
前 멤버 고지용
( 高志鎔 / 80 / 2000년 5월 20일 해체 )

강성훈
( 姜成燻 / 80 / 2019년 1월 1일 제명 )
멤버 은지원
( 殷志源 / 78 /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 A )


이재진
( 李宰鎭 / 79 / 부산광역시 사하구 / O )


김재덕
( 金在德 / 79 / 부산광역시 사하구 감천동 / B )


장수원
( 張水院 / 80 / 서울특별시 서초구 / A )
데뷔 1997년 4월 15일
정규 앨범 [학원별곡]
활동기간 1997년 4월 15일 ~ 2000년 5월 20일 (해체)


2016년 3월 31일 ~ 현재
소속사 DSP미디어 (1997년 ~ 2000년)


YG엔터테인먼트 (2016년 ~ 현재)
공식색 노란색
팬덤 Yellow Kies (옐로우키스)

 


 

개요

1997년 4월 15일에 DSP미디어 소속으로 데뷔한 대한민국의 4인조 보이그룹이다.

2000년 5월에 해체되며, 2016년 4월에 재결합을 하고, YG엔터테인먼트에 소속되어 활동을 시작하였다.

1997년~2000년 활동 당시 H.O.T.와 함께 가요계 아이돌 돌풍의 쌍두마차였으며, 아이돌 팬덤의 시초로 알려져 있다.

공식색은 노랑이다.

그룹명 '젝스키스'는 독일어로 여섯 개의 수정이라는 뜻으로, 팀 내에서 멤버 세 명씩 블랙 키스와 화이트 키스로 구분했다.

블랙키스는 (은지원, 이재진, 김재덕), 화이트키스는 (장수원, 고지용, 강성훈)이다.

활동을 거듭하면서 이 컨셉은 초창기 컨셉으로 남는다.

젝스키스의 약칭인 '젝키'로도 주로 불리곤 한다. 공식 색은 노란색이며 팬클럽은 옐로우키스(옐키)이다.

1997년 4월 15일에 데뷔해 2000년 5월 20일 공식 해체했고, 2016년 무한도전 토토가 2를 통해 재결합하게 된다.

이후 고지용을 제외한 나머지 5인이 YG 엔터테인먼트와 계약을 체결하고 활동에 나서게 되었다.

2019년 1월 강성훈이 공식제명되어 4명으로 활동 중이다.

전 소속사인 DSP미디어는 젝스키스와 계약서를 쓰지 않았고, 지금까지 젝스키스 상표권을 신청한 바도 없다.

YG엔터테인먼트와는 계약서를 작성했고 상표권 또한 YG 측에서 정식으로 등록해 젝스키스의 상표권을 가지고 있다.

 

인기

1990년대 후반에 활동한 1세대 아이돌로, 3년이라는 짧은 활동 기간동안 수많은 히트곡을 내며 줄곧 정상권에 있었고, 다수의 음악 방송 1위를 비롯해 각종 가요 시상식 본상은 물론 98년 서울가요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하기도 한 정상급 아이돌이었다.

데뷔 초 10대 여성 팬덤이 상당했으며 활동할수록 젊은 여성 층과 남성 팬들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최초로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한 아이돌 그룹이면서 매년 단독 콘서트를 개최해 매진을 기록하였으며 2000년 해체 발표 후 드림콘서트(서울올림픽주경기장)에서 열린 고별 무대에 약 5만 명의 팬들이 몰려들었다.

음악 외적인 예능, 연기, 뮤지컬 등의 활동이 미비했던 당시에도 데뷔 초부터 고정 예능에 출연했고, 멤버 전원이 라디오 DJ를 하였으며, 영화, 뮤지컬에도 출연했고 젝키의 이름을 붙인 상품도 출시한 바 있다.

젝스키스가 건재하던 당시에는 (1998년 ~ 2000년 초) 같은 1세대 아이돌인 신화와 god보다 훨씬 높은 인지도와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이러한 평가는 젝스키스가 재결합 후 과거의 이력이 알려지면서 재평가가 이루어지게 된다.

특히 짧은 시간의 활동후 십수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잊지않고 있는 팬들의 관심에 대중들이 당대 인기를 실감하게 되며, 새로운 세대들까지 관심을 가지며 새로운 패러다임까지 제시하고 있다.

H.O.T.와의 비교 문제의 경우, H.O.T.와 격차가 컸던 것은 맞다.

하지만 당시 H.O.T. 팬덤 규모가 워낙 컸던 것이지, 젝스키스 자체의 절대적 인기치만 따지면 매우 높은 수준이었다.

즉 1위와 2위의 격차가 컸긴 하지만, 2위와 그 밑의 격차도 컸다.

그리고 젝스키스는 노래의 대중성이 확보된 경우가 많았다. 특히 커플은 역대급 대중성을 오랜 기간 유지했다.

참고로 양 기획사 입장에서는 라이벌 구도를 통해 동반 상승효과를 얻으며 많은 인기를 모으게 돼서, 서로가 서로에게 큰 도움이 되는 존재였다.

SM 이수만 사장이 고맙다며 젝키 매니저한테 밥도 사주고 등도 토닥여주는 일이 있을 정도였다.

2016년 재결합 후 상당한 규모의 팬덤을 보유하고 있다. 이전 활동 당시에 보유했던 기존의 팬덤과 동시에 재결합 소식 이후 새로운 팬덤이 유입되었다.

그 중에서도 특이할 점은 젝스키스가 오랜 공백을 딛고 시간이 많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어린 팬층을 적지 않은 비율로 보유하고 있다는 점인데, 때문에 팬들의 연령 스펙트럼이 꽤나 넓은 편이며 아이돌 팬덤 중에서도 독특한 케이스.

3년이란 짧은 활동 후 16년이란 세월이 지났음에도 떠나지 않은 수많은 팬들과 지금의 세대가 아닌 그룹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새로운 팬층까지 유입시킬 수 있는 저력있는 그룹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이들이 한창 활동했던 시기인 1997년~2000년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은 현재 기준 성인으로 성장했으며 해당 나이대의 현역 아이돌들과 선의의 경쟁을 벌이기도 한다.

또한 젝스키스는 16년이 지나 재 결합 당시에도 많은 팬들이 응원을 겉삼아 보고싶었다 다시 돌아와줘서 고맙다 등등 훈훈한 모습도 많이 보여줬다.

 

멤버 영입 과정

은지원과 강성훈이 제일 먼저 캐스팅이 되었고, 그 뒤를 이어 장수원, 이재진, 김재덕, 마지막으로 고지용이 젝스키스에 합류하였다.

'블랙 키스'와 '화이트 키스'를 K-pop 최초의 유닛으로 볼 수도 있지만, 개인 활동도 허용이 안되고 완전체로만 활동해야 했던 당시 분위기 상 실제 유닛으로 활동한 적은 없다. 활동목적이 아닌, 컨셉과 파트를 둘로 나눈 것으로, 실제로 데뷔 초엔 블랙 키스는 검거나 짙은 옷, 화이트 키스는 희거나 밝은 옷을 입고 나오곤 했으나 이후엔 이마저도 별 구분 없이 멤버 전원이 옷을 통일하게 되었다.

블랙 키스와 화이트 키스를 나누게 된 비화가 2016년 9월 10일 콘서트 Yellow Note에서 밝혀졌는데, 멤버들 중 유일하게 이재진만이 알고 있었다. 일본 그룹 V6가 멤버들끼리 나이차가 심해서 연령대를 기준으로 20th Century(토니센)와 Coming Century(카미센)로 구분하는데, 여기서 모티브를 얻은 것이라고 한다.

당시 은지원과 강성훈은 하와이에서 유학 중이었고 은지원은 클럽 DJ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당시 이호연 사장이 은경표 PD와 같이 하와이에 놀러왔었는데, 은지원이 일하고 있던 클럽 사장과 이호연이 친분이 있었다. 이호연은 클럽 사장에게 남성 듀오를 만들 계획이라고 말하자 사장은 은지원과 강성훈을 추천했다고 한다. 이호연은 클럽에서 즉석 오디션을 본 뒤 공식적으로 두 사람에게 가수 활동을 제안하였다. 제안을 승낙하고 한국으로 귀국한 둘은 듀엣 데뷔를 예정으로 대성기획에서 연습생 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던 중 H.O.T.가 캔디로 대박이 터진 것을 목격한 사장이 듀엣에서 6인조 아이돌로 노선을 변경하고 급히 추가 멤버 모집을 시작하였다. 이때 강성훈은 회사를 나가겠다고 강하게 반발했다. 하지만 사장의 설득으로 마음을 바꾸어 먹는다.

장수원은 본래 친구 따라 오디션에 따라갔으나 정작 친구는 떨어지고 본인이 합격한 경우다. 여기까지만 보면 흔한 아이돌 가수들의 합류 과정과 비슷하지만 정말 특이한 것은, 오디션장에서 잘 하는 게 뭐냐는 질문을 받고 장수원이 "아무것도 없는데요?"라고 답했더니, 사장이 솔직해서 좋다며 그대로 합격시켰다는 사실이다. 당시 장수원은 학교 댄스팀에 속해 있어 춤을 잘 췄고, 이에 1차 오디션을 통과하고 2차 오디션만 남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본인이 가수로 데뷔하겠다는 큰 의지가 없었고, DSP 측에서 2차 오디션에 나와달라고 전화를 했다고 한다. DSP 측에서 붙잡은 면이 큰 것이다(2차 오디션에서 위 발언이 나왔다고 한다). 이 점은 2015년 1월 8일 SBS 박소현의 러브게임에서 박소현도 증언했다. 당시 박소현도 DSP 소속이었는데, 이호연 사장한테서 젝스키스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한다. 그 중에서 장수원의 경우, 친구 따라 왔는데 가수가 되려는 의지가 별로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사장님은 무조건 잘된다고 하길래, 저 친구의 어떤 모습을 본 걸까 의아했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오랜 시간 지나도록 롱런하는 것을 보니, 사장님은 괜히 사장님이 아니라 느꼈다고 한다.해당영상

이어서 학창시절에는 부산에서 춤으로 유명했고 당시에 이주노의 소속사에서 연습생으로 있던 이재진과 김재덕을 스카우트해왔다. 당시 사장이 이주노 사무실에 찾아와서 둘을 보고는 김재덕만 뽑아갔지만, 이후 이재진도 합류하게 된다. 이호연은 이재진이 화면으로 봤을 때 코가 너무 크다며 뽑기 싫어했는데, 은지원과 김재덕이 사장과 매니저를 설득해 뽑힐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학교 얼짱으로 유명했던 고지용이 강성훈의 추천으로 합류했다.

 

개인 활동
  • 은지원
    해체 이후 가장 성공적인 솔로 활동 및 예능을 지속하고 있다. 처음에는 G-Production이라는 자회사를 세워 음반을 냈다. 1집은 댄스 위주, 2집부터는 자신이 꿈꾸던 힙합 쪽으로 본격적인 전환을 한다. 3집부터 드렁큰 타이거와 손잡고 활동하여 타이틀곡 '만취 in melody'를 대중적으로 성공시킨다. 이후 1박 2일에서 은초딩 캐릭터로 자리매김하여 신서유기 등 예능에서도 큰 인기몰이를 하였고, 소속사를 차려 힙합 트리오 클로버로 활동하며 가요계 활동도 꾸준히 이어나갔다.
  • 김재덕
    김재덕은 군복무를 같이한 것을 인연으로 함께 동거까지 하게 된 토니 안이 운영하는 티엔네이션에서 음반 제작 부서의 프로듀서로 활동을 이어갔다. 2016년 동아TV 맛집남 시즌1에 김재덕 토니 안 은 공동 MC를 맡으며 브로맨스를 과시한다.
  • 장수원
    J-Walk라는 그룹을 결성하여 활동하고 있으며, 잔잔한 발라드와 미디움 템포 등의 장르를 내세워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특유의 중저음 톤으로 젝스키스 때보다 보컬이 훨씬 발전했다. 군 입대 전 마지막 음반 발매 이후 활동이 없는 상태였다가 2013년 9월부터 부부 클리닉 사랑과 전쟁 2의 아이돌 특집 3편으로 복귀하였고 미생물에도 출연하며 발연기의 전설이 되었다. 장수원 로봇 연기로 불리는 특유의 발연기를 아예 컨셉으로 잡고 예능 및 방송에서 활발히 활동 중이다.
  • 이재진
    해체 이후 DOUBLE J(1집), Go back(2집), 충전(3집)등 주로 댄스곡으로 활동했다. 2005년 솔로 3집을 끝으로 방위산업체에서 애니메이션 관련 일을 맡아 착실히 복무하였지만 서류상의 업무가 아닌 다른 업무를 맡았다는 이유로 재입대 처분이 내려져 병역 비리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2008년 8월에 현역으로 재입대하였으나 재입대 직전 홀어머니를 잃으며 우울증을 앓는 등 건강에 큰 이상이 생겼고, 급기야 2009년 3월에는 치료를 위한 휴가에서 복귀하지 않아 물의를 빚었다. 하지만 군 복귀 후 수색대로 보직을 변경해 성실히 복무하였다. 2010년 8월 전역 이후 일본 유학을 위하여 일본어를 공부해왔다고 하며, 자신의 원래 전공인 그림 쪽으로 나아가고 싶다는 뜻을 밝히며 대학에서 미술을 배웠다.
  • 고지용
    해체 이후 인터넷 방송 DJ와 연기자 데뷔를 준비하기도 했으나 2001년 이후 사실상 연예계와 인연을 끊었다. 그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한국으로 돌아와서 사업을 하고 있다. 2013년 11월에 의사 허양임과 결혼했고 2014년 10월 경에 아들 승재를 얻었다.
  • 강성훈
    발라드 가수로 선회하여 4장의 음반을 내는 등 2004년까지 솔로 활동을 지속했다. 2002년 2집의 "My Girl", 2003년 3집의 "아껴둔 이야기" 등이 사랑받았다. 이후 10년 동안 공백기를 가진 뒤 2014년 4월, 젝스키스 데뷔 17주년 기념 "커플" 리메이크 음원을 발표했다. 공백기 동안 병역 비리에 연루돼 재입대 처분을 받고 사기 혐의로 피소되는 등 여러가지 우여곡절이 있었다. 특히 유흥비에 쓰려고 지인들에게 11억 원을 사취했다는 의혹을 받아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었다. 사건 때문에 1심에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 받고 구치소에 수감되었다가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2016년 4월에 젝스키스 컴백 및 무한도전 측의 요청으로 MBC 출연 금지가 해제되어 무한도전에 출연할 수 있었다.

 

해체

젝스키스/해체

 

2000년 5월 18일, 기자회견을 갖고 해체를 발표했다. 당시엔 이유가 명확하게 언급되지 않아 상당한 논란이 되었다. 팬들은 이호연이 강제로 찢어놔서 해체당한 것이라는 루머를 인터넷에 수없이 퍼뜨렸다. 이는 2016년 젝키가 재결합하며 더욱 심해졌다. 그러나 그간 멤버들이 방송에 출연할 때 마다 이에 대한 질문이 자주 나왔고, 그때마다 강제 해체가 아니라고 밝혔다. 이재진의 경우 팬들의 루머와 비슷한 뉘앙스로 말한 바 있지만, 훗날 밝혀진 바를 보면 그것은 이재진 개인의 생각이었다. 다른 다수의 멤버들 생각은 달랐다.

 

재결합

젝스키스/재결합

 

여담
  • 로고 수정 모양, 멤버 수인 6, 젝스키스 첫 글자인 S, 그룹명이 모두 들어가 있고, 멤버 이재진이 디자인에 참여했다
  • 멤버 전원이 자연미남이다. 2016년 재결합 당시 30대 후반임에도 불구하고 동안이다. 날이 갈수록 젊어지는 것 같기도,,,,점점 리즈를 갱신한다. 어제보다 오늘 더 잘생겼고 오늘보다 내일 더 잘생길 것이다.
  • 맴버들이 하나같이 비글미를 뿜어낸다. 오죽하면 그 은초딩 은지원이 가장 정상인으로 취급된다. 예나 지금이나 맴버들끼리만 출연하는 방송분을 보면 대화의 주제가 시시각각 다른 산을 오르다가 아무말 대잔치로 변한다.
  • 이 그룹은 팬픽도 유명했다. 공식 팬픽은 젼훈(은지원,강성훈), 진죵(고지용,이재진), 숸덕(장수원,김재덕)이다.
  • 역대 가요계 라이벌을 대표하는 한팀으로 실제 팬덤의 규모는 경쟁그룹인 H.O.T.가 압도적으로 컸으나은지원 왈 "계란후라이였어" 활동하는 내내 방송가에서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다. 현재에도 언론에서 한팀이 언급되면 높은 확률로 같이 언급된다. 충성심이 높은 아이돌팬 특성상 상대그룹에 대해 악감정이 높아 확실한 타도세력이 많았던것도 사실이며, 세월이 지난 현재에도 존재한다. H.O.T.의 넘사벽 인기에 비하면 팬덤이 적은 것은 맞지만, H.O.T.를 제외하면 젝키에 대적할 수 있는 다른 아이돌은 없었다. 확실한 2인자로서 H.O.T.의 라이벌로 불리기에는 충분했다.
  • H.O.T. 팬들과 젝스키스 팬들의 신경전은 매우 치열해, 심할 때는 경찰까지 출동하는 일이 벌어졌다. 팬들의 직접적인 싸움이 워낙 격렬해서 항상 구급차가 상주하다시피 했을 정도였다. 당시 싸움이 격렬했던 만큼 큰 사고도 많았다.
  • 반면 젝스키스 멤버들은 H.O.T. 멤버들과 관계가 꽤 좋은 편. 김재덕 토니 안과 10년이나 동거하고 있을 정도고, H.O.T.의 재결합도 평소 친하게 지내던 젝스키스의 재결합에 자극을 받았다. 90년대 H.O.T.의 무협팬픽인 협객기가 시중에 출판되었을 당시 소속사에서 멤버들의 상표권 같은 문제로 소송을 걸었는데, 사유 중 하나가 좋은 관계로 지내고 있는 은지원을 작중에서 H.O.T. 멤버가 살해하는 묘사가 있어 명예훼손이 우려된다는 것이었을 정도다.팬픽에서마저 상대 멤버 못죽여 안달인 팬덤싸움 클라스
  • 원래 그룹 이름 후보들이 하나같이 주옥같다. 마그마, 용암,  등. 특히 육계장이 유력했던 모양이다. 이에 맞춰 공식색도 빨간색이 될 뻔 했다. 그룹 초기에 공식색이 노랑 말고도 빨강이 포함되었던 것은 이 영향이다. 이후 사장이 MBC 은경표 PD에게 작명을 부탁했고 그 결과 젝스키스라는 이름이 탄생했다. 은경표 PD는 이호연사장과 96년도에 하와이로 놀러갔었는데, 이때 이호연이 은지원과 강성훈을 스카우트 해왔었다. 하와이에서 강성훈과 은지원이 이호연 앞에서 오디션을 볼 때, 은경표 PD도 그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젝스키스라는 이름을 괜히 지어준 것이 아니었다. 콘서트 Yellow Note에서 후보였던 이름들을 언급했다. 은지원 육개장이 건강식이니 괜찮다고 밝혔다.
  • 소속사가 음반을 내기도 전인 1997년 3월부터 각 통신망에 멤버들의 사진과 새로 나올 음반에 대한 정보들이 제공했다. 그로 인해 젝스키스는 매체에 출연하기도 전부터 10대들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데뷔 무대 때부터 팬들이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라디오스타에서 김재덕이 한 말에 따르면, 데뷔 전인데 팬들이 자신의 숙소에 들어와 자는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었다고 한다.
  • 1999년 11월 29일 평양에서 2000 평화 친선 음악회에 참가했다. 멤버 강성훈을 여성으로 알고 혼성 그룹으로 표기하여 여러 사이트에서 화제가 되었다. 2008년 놀러와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당시 매니저 등은 모두 한국에 남고 이호연 사장만 동행 가능했다고 한다. 또한 말을 잘못하면 체크를 해, 그 기준을 넘으면 북한에 억류된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래서 핑클이랑 젝키 10명이서 한방에 둘러앉아 있을 때, 도청될지도 모르니 서로 말 조심하자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때 은지원이 갑자기 '나는 공산당이 싫어' 라고 하더니, '이거 고지용이 한거에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은초딩은 이때부터 이미 시작된 듯... 2015년 해피투게더에 성유리가 출연했을 때, 당시 평양에서 젝스키스와 찍었던 사진을 공개하기도 했다.# TV에 평양이라 하면 단골로 나오는 장소다.
  • 한편 뮤직비디오를 감독 사비로 찍게 시켰다는 루머를 퍼뜨리는 경우가 있는데, 정확한 사실 관계는 어떤 신인 감독이 Road Fighter 노래가 너무 마음에 들어 자기네 회사에서 비용을 전액 부담해 뮤비를 찍고 싶다고 DSP에 연락하여 찍었다는 것이다.(출처 : #) 놀랍게도 그 감독이 빅뱅 2NE1, 블랙핑크의 뮤직비디오를 대부분 연출한 YG 뮤직비디오 전담 감독 서현승이다. 해체 16년 후 젝키가 YG로 오게 됐으니 사람 인연이란 것이 참 희한하다.
  • 데뷔 당시 고지용이 폼생폼사로 활동하는 것을 극구 반대했으나, 은지원이 이 곡으로 무대에 오르자고 밀어붙여 수록곡으로 묻힐 위기에서 벗어났다는 '카더라'가 있다. 이외 3.5집을 준비할 당시 이호연 사장은 은지원의 똥고집에 머리를 썩히다 은지원의 '자신이 다 책임지겠다'는 말에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들었고, 그렇게 "커플"이 3.5집 타이틀곡이 되었다는 카더라 통신도 있다. 커플 때에는 사장이 반대하는 것이다보니 분위기가 상당히 험악했다는 소문이 있다. 다만 위 서술은 출처가 없고 어디까지나 팬들 사이에 있는 소문이다. 아무튼 그 소문이 사실이라고 가정하면, 은지원의 선구안이 뛰어났던 것이다. 회사 측에서는 커플을 타이틀곡으로 선정하는 것을 주저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마경식은 작곡가로서 그때까지 제대로 된 히트곡이 없었다.# 게다가 기존에 해오던 음악과 정반대 느낌의 곡을 작곡했다. 커플 노래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슬래쉬메탈 그룹 아발란쉬의 보컬이었다.가창력이 엄청나다 커플 이미지는 1도 안 떠오르는 모습이다 반면 3.5집의 '너를 보내며'를 작곡한 김석찬은, 핑클 내 남자친구에게로 초대박을 쳤던 상황이었다. 게다가 '너를 보내며' 노래 자체도 충분히 타이틀곡으로 지정할만한 퀄리티다.# 젝키의 대부분 뮤비가 그렇지만, 그 중에서도 커플 뮤직비디오는 사무실 문짝이 나오는 등 유독 저퀄리티다. 커플 타이틀곡 문제로 사장이랑 대판 싸워서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 데뷔 당시 보컬 트레이닝을 받지 않았다. 메인보컬인 강성훈조차 보컬 레슨을 받지 않고 평소 노래 실력 그대로 데뷔한 것이다. 장수원은 해체 후에 피눈물을 흘리듯이 연습하여 득음했다. 춤은 위에 각주에 달아놓은 이재진의 컴백 자서전 원문을 보면 꽤 기간을 들여 연습한 것으로 보인다. 자서전을 보면 연습생 시절 회사에서 기계체조까지 가르쳤다고 한다. 팔 뻗는 것만 반 년 연습했다는 말도 있다. H.O.T. 데뷔 후 급히 멤버들을 모아 데뷔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 계약서도 작성하지 않고 멤버들조차 정확한 수익 분배를 모르는 상태로 활동했기에, 일부 팬들은 젝스키스로 번 돈을 핑클에게 투자하느라 젝스키스의 살인적인 스케줄이 이어진다고 생각하며 비난을 했다. 다만 이 과정에서 허위 사실이 유포되어 있기도 하다. 자세한 내용은 젝스키스/DSP 관련 루머 문서를 참고할 것. 멤버들이 정확한 수익 분배를 몰랐던 것은 정산이 부모와 회사 간에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러한 일들로 인하여 상당수의 젝스키스 팬들은 핑클을 싫어했지만 처음부터 그랬던것은 아니다. 핑클의 데뷔전 젝스키스 후배로 걸그룹이 데뷔한다고 하여 젝스키스 팬들은 누구보다 기뻐했고, 기대했다. 일부 팬들은 핑클이란 이름도 지어주는데 큰 일조를 하였다. 하지만 핑클 데뷔후 멤버간의 스캔들, 핑클로 인한 왕중왕 실패, 소속사의 차별대우가 보이면서 젝스키스 팬들은 핑클을 좋아할수 없었고 이후 팬덤 간의 사이도 나빠지면서, 핑클에 대한 안티활동도 심했다.# 물론 젝스키스와 핑클 당사자들은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북한에 공연 갔을 때 방에 모여서 같이 이야기를 하며 놀았다고도 했고, 실제로 각 팀의 리더인 은지원과 이효리는 친한 편으로 알려져 있다. 2003년에는 은지원이 신촌에 실내 포장마차 점을 개업했는데, 보통 여기저기 동료 연예인들을 불러야 홍보에 도움이 되지만 은지원은 사람을 불러 모으는 일에 익숙지 않다는 이유로 연락을 전혀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던 중 이효리가 새벽에 제발로 찾아왔는데, 은지원은 이효리를 "손님이 많아 자리가 없으니 가라"고 돌려보냈다. 그러자 종업원들이 "남들은 이효리 못 불러서 안달인데 그냥 보내면 어떡하냐"며 은지원을 혼냈다고 한다. "자리는 여분의 탁자로 만들면 된다"며 흥분하는 종업원들의 말에 은지원은 '왜 난리지'하는 표정으로 대답 없이 눈만 껌벅거렸다고...기사 김재덕은 2015년 라디오에 출연했을 때, 당시 같은 소속사였던 핑클과 친하게 지냈으며, 가끔 술도 한 잔 했었다고 말했다.# 2012년 3월 25일 SBS 정재형 이효리의 유 & 아이에서는 이효리와 은지원이 같이 출연했다. 이효리는 당시 젝키와 H.O.T.의 1위 대결에서 젝키가 지면, 같은 소속사라는게 뭔지 우리가 뭔가 진 것 같고 눈물이 났었다고 밝혔다. 은지원도 핑클이 어디 대결 나가면 잘하라고 응원했다고 말했다. 동료 연예인들을 깎아내려서 좋을 게 없으므로 드러내지 않는 것일 수도 있지만, 젝키 멤버들은 소속사에 불만이 있었다거나 소속사 때문에 힘들었던 이야기는 종종 언급했어도 핑클에게 악감정을 드러낸 적은 없...었는데 2016년 6월 1일 방영된 라디오 스타에서 '전 소속사의 관심이 핑클에게 옮겨지고 우리는 홀대받은 것 같다'고 섭섭함을 토로했다. 물론 핑클을 비난한 것이 아니라 전 소속사에 불만을 털어놓은 것이다. 하지만 핑클도 무계약 상태에서 활동했고, 새벽1시30분에 재벌 오너들의 술자리에서 2곡을 부르고 3천만원을 받았다는 잡지 문구가 있는 것을 보면, 어디까지나 젝키보다 대우가 좋았다는 것이지 딱히 공주 대접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핑클도 하루 평균 2시간씩 자며 스케줄을 다닐 정도로 빡세게 활동했다. 하지만 아무 탈 없이 소화해서 매니저가 천하장사라고 불렀다고...# 다만 핑클은 젝키보다 후발주자라서 더 안정적으로 시작할 수 있었기 때문에 유리한 위치이긴 했다.
  • 젝키와 핑클은 동시대에 활동했지만, 젝키와 달리 핑클은 각주와 같이 소속사와의 사이가 좋게 끝났다. 이런 차이에 대해 훗날 밝혀진 바를 보면, 젝스키스는 김기영 라인이고 핑클은 길종화 라인이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DSP 이호연 사장이 제일 위에 있고 그 밑으로 김기영과 길종화 2명이 있었는데, 이 두명이 서로 세력다툼을 한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이 둘은 고등학생 때부터 이호연이 데리고 있으면서 대학 학비까지 대주며 키웠다.# 다만 이호연이 뇌출혈로 쓰러진 시점 전후로 해서 둘 다 DSP를 나왔다. 김기영 라인은 젝스키스, 클릭비, SS501로 알려져 있고, 길종화 라인은 핑클, 카라로 알려져 있다. 김기영과 핑클은 거의 상관이 없었다고 한다. 김기영의 경우, 2016년 라디오스타에서 젝키 멤버들이 해체이유에 대해 말할 때 사장님과의 관계가 아니라 매니저(김기영)랑 사이가 안 좋았다고 말할 정도였다. 김기영 본인 인터뷰에서도 해체 이후 젝키 멤버한테서 전혀 연락이 오지 않았다고 밝혔다.# 반면 길종화의 경우, 2012년 본인 결혼식 때 옥주현 이효리가 축가와 사회를 맡을 정도였다.# 이효리는 길종화가 나와서 차린 B2M엔터테인먼트로 이적했는데, 당시 계약서를 쓰지 않고 계약금을 받지도 않았다. 그리고 계약이 오래전에 끝났는데도 계속 의리로 남아있기도 했다.기사 성유리는 2015년 인터뷰에서 "종화 오빠 생각이 많이 난다"며, "S.E.S. 친구들을 보면 요정같고 귀여운 장난을 치곤 하던데, 우리는 네 명이서 힘을 모아 매니저 오빠를 괴롭혔다.젝키랑 같은소속사 아니랄까봐 그래서 오빠들이 저희 때문에 힘들어 했다"고 털어놨다.#
  • 2007년 8월 20일 핑클 이진이 야심만만에서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를 말했다. 데뷔전 연습생 시절 사장님이 보고 있으면 열심히 연습하다가 사장님이 나가시면 딴 짓을 했는데, 당시 젝키한테 선물이 쌀자루로 몇개씩 오면 그때 그걸 풀어봤다고 한다. 그리고 갖고 싶었던 것 있으면 양심상 하나만 챙기고 다시 다 정리해놨다고 한다. 영상을 보면 헛나온 이야기에 자기도 당황하고 있고, 계속 죄송하다고 하고 있다. 01:02:40 정도부터 보면 된다.
  • 이재진의 매제이자 젝키의 현 소속사 사장은 한국 연예계에서 대형기획사 양대산맥 중 하나로 불리는 곳의 수장이다. 그 덕분에 눈치 안 보고 지상파에서 해체 당시의 상황을 직접 말할 수 있게 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이렇게 생각하기는 어렵다. 애초에 이호연 사장은 몇년째 거동불가능한채 말도 못하는 상태로 병상에 누워있고, DSP는 이호연이 쓰러진 후 많은 직원이 나가거나 쫓겨나서 현재 젝키 시절 직원은 거의 없다. 회사 자체 상황도 암울하다. 이에 그런 이야기를 할 때 눈치를 볼 대상 자체가 이제는 없다시피 한다.
  • 2016년 젝스키스의 재결합 후 YG엔터테인먼트와의 계약 소문이 돌자, 이호연 전 사장이 거동불가능한채 누워있는데 인사는 하러 왔어야 하지 않냐며 YG에 앞서 DSP에 연락했어야 한다는 언플 기사가 나왔다. 이에 대해 젝키 팬들이 몰려와서 해당기사 댓글은 악플 일색이다해당기사. 6년째 거동불가능하고 말을 못하는 상태로 누워있는 이호연이 기사를 냈을리는 없는데, 병상에 누워있다 뜬금없이 욕을 엄청 먹게 되었다. 이 언플은 이호연 사장의 공로를 부각시키는 효과보다는, 대량의 악플과 허위 루머 유포 같은 부작용이 더 컸다. 최다추천 댓글 내용들을 보면 허위루머의 총집합 편일 정도다. 강제로 해체당했다, DSP 측이 젝키 상표권 신청했다가 거절당했다, 젝키로 소속사가 300억이나 벌었다, 밤무대 돌렸다, 술자리 불러냈다, 3000만원 행사 뛰고 80만원 받았다는 등의 내용인데, 젝스키스/DSP 관련 루머 문서에서 보듯이 이는 사실로 보기 어렵다. 그러나 팬들에 의해 최다추천에 박아놨으니, 이 기사를 계기로 일반인들이 그런 루머를 믿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만 해당 언플 기사를 낸 DSP 또한 비판을 피할 수는 없다. 젝키 시절 회사와 트러블이 심했다는 것은 사실이고, 젝스키스 팬덤이 이호연 사장에 대해 악플로 도배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상황이었다. 특히 요즘 대중들은 저런 식의 기사를 "앞에 인사 얘기는 그냥 쓴 것이고 결국 DSP랑 계약하자고 언플한거네"라고 받아들인다. 실제로도 그런 목적이 있었다면 어리석은 판단이다. 왜냐하면 DSP에 대한 일반인들 시선조차, 이호연 사장이 쓰러진 이후 회사가 쇠퇴하여 젝스키스를 감당할 능력이 안된다고 봤기 때문이다. 젝키 멤버들 생각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결국 아무 성과 없이 욕만 먹은 언플이다. 이호연 사장이 물러난 이후 각종 오판들로 쇠퇴한 경력을 봤을 때, 그런 오판들의 연장선 상에 있다고 보인다. 물론 이호연 사장이 젝키를 만들고 키웠으니, 6년째 식물인간처럼 누워있는 사장한테 병문안 좀 오라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는 개인적으로 하면 될 일이지, 저런 식으로 언플할 사안은 아니었다. 게다가 말도 못하고 거동불가능한 상태인 이호연이 기사에서 나오는 의견을 개진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아예 저런 기사가 나왔다는 사실조차 모를 가능성이 높다. 기사 대부분이 기자의 상상이거나 DSP 측의 의견일 것이다.
  • 젝키 팬덤이 이호연을 저주하는 수준으로 싫어했던 것이지, 젝스키스 멤버들이 그런 관계는 아니었다. 해체 이후 직접 이호연에 대해 언급한 바를 보면 다음과 같다. 은지원, 장수원, 김재덕은 2013년 DSP 페스티벌에 참석해서 공연을 펼쳤다. 은지원은 "사장님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다. 사장님은 늘 우리가 무대를 하면 뒷편에 서서 함께 해주셨다. 오늘은 몸이 좋지 않으셔서 참석 못하셨다"라며 "사장님 덕에 우리가 아직도 이렇게 무대에 설 수 있는 것 같다"며 고마움을 전하며 "의리"를 외쳤다. 이어 김재덕 역시 "이호연 사장님의 빠른 쾌유 바란다"고 덧붙였다.## 김재덕은 OBS와의 인터뷰에서는 "젝스키스가 있기까지 DSP라는 기획사가 있었고, 또 사장님에게 고마움을 많이 느끼고 있기 때문에 출연 결정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영상 22초부터 강성훈은 2015년 1월 30일 러빙핸즈에서 "팬들은 (이호연 사장님을) 안 좋아하지만 DSP 사장님이 젝키를 위해서 많은 일은 하신 건 맞아.. 마지막에 안 좋게 끝나서 그렇지."라고 말했다. 이재진의 경우 대놓고 싫어한다는 말을 하고 다녔다. 과거 싸이월드 시절 호연이라는 이름을 가진 팬이 글을 남기자, 답글로 "호연이라.."라며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젝키 결성 당시 6명 중 유일하게 이호연이 탐탁치 않아했던 멤버가 이재진이다. '화면으로 보니 코가 커서 안 되겠다'고 퇴짜를 놓았지만, 나중에 은지원, 김재덕이 회사를 설득하여 멤버로 데려왔다고 한다.영상 14분부터 이때부터 악연이 시작됐는지도 모르겠다. 기타 김현중의 2013년 아시아 경제 인터뷰#에서 "은지원 형도 이효리 누나도 다 지금은 이적을 했지만 전 회사를 그리워해요. 사실 회사를 옮기고 나서 이전 회사를 그리워하는 경우는 많지 않잖아요. 하지만 모두가 그리워하는 걸 보면 사장님은 참 좋고 대단한 분이셨던 것 같아요. 역시 정이라는 것은 위대하다는 걸 느끼죠."라고 말한 바 있다. 그렇더라도 90년대 SM가수들이 지금도 수시로 이수만을 찬양하는 것과 비교해보면 이호연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는 편이다. 이는 이수만은 여전히 권력의 정점에 있는 반면, 이호연은 병상에 누워있던 신세인 면이 클 것이다. 2016년 라디오 스타에 출연해서 해체이유에 대해 말했는데, 이호연 사장과의 관계가 아니라 가깝게 지내던 매니저(김기영으로 추측됨)와의 사이가 나쁜 것이 원인이었다고 밝힌바 있다.
  • 재결합 당시 DSP와 계약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젝스키스 멤버들은 2016년 12월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아래 인터뷰에 언급된 이호연 사장의 경우, 명목상 대표라고는 하지만 뇌출혈로 인해 거동이 불가능하고 감정표현 정도만 가능한 상태로 수년째 누워만 있다. 이에 본 발언은 결국 완전 다른 회사가 됐다는 뜻이다.

“DSP미디어는 우리가 활동할 당시와 전혀 다른 회사였다.”


그룹 젝스키스가 재결합 활동을 데뷔 당시 소속사인 DSP미디어와 협의하지 않은 이유를 이 같이 밝혔다. 젝스키스는 1일 서울 마포구 YG엔터테인먼트 사옥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재결합을 하며 DSP미디어를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면서도 “(과거) 대표님은 편찮으시고 매니저는 단 한명도 누군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전혀 다른 회사였다”고 말했다. 은지원과 제이워크로 활동했던 장수원, 김재덕은 과거 DSP미디어 가수들이 모두 출연한 패밀리 콘서트에도 출연한 적이 있다. 당시에도 과거 함께 일했던 매니저는 없었다고 했다.
http://entertain.naver.com/read?oid=018&aid=0003690448


과거 소속사였던 DSP미디어와의 연결점
“DSP는 우리가 알던 과거 소속사가 아니었어요. 이호연 대표님 말고는 우리가 아는 스태프는 아예 없죠. 다른 회사가 돼 있는 곳이라 교감할 수 없었어요.”(장수원 강성훈 은지원)
http://allets.com/bbs/board.php?bo_table=allets&wr_id=656&sca=STAR


과거 소속사 DSP미디어가 아닌 YG와 손을 잡게 된 이유도 솔직하게 전했다. 은지원은 "예전에 DSP 패밀리 콘서트에 갔는데 저희가 활동할 때 있던 분들이 단 한분도 없었다. 이호연 사장님 외에 다른 회사가 되어있어서 당황스러웠다"고 말했다.
http://entertain.naver.com/read?oid=111&aid=0000473169


이는 그냥 둘러댄 말이 아니라, 사실을 말한 것이라고 보인다. 왜냐하면 2011년 카라 전속계약해지 통보 사건에서, 카라 측의 주장과 같은 내용이기 때문이다.

현재 카라 측은 dsp의 매니지먼트 미숙에 대해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들이 문제로 삼는 것은 카라 매니지먼트를 총괄하는 DSP 이호연 사장의 부인이다.

작년, 이호연 사장이 뇌출혈로 쓰러진 이후 사장 부인이 경영권을 쥐게 된 가운데, 그녀는 연예 소속사 관리 경험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소속사 경영을 시작, 그로 인해 많은 중역 간부들이 회사를 떠났다고 한다. 이들 중역 간부 또는 베테랑 직원들은 핑클, ss501 등의 매니지먼트 경험을 가지고 있는 매니지먼트 전문가들이었다.

또한 사장 부인은 카라의 매니지먼트를 함에 있어서도, 세세한 것까지 일일이 지지해 카라 멤버들과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것이 카라측의 주장이다.

요컨대, 이호연 사장이 자리를 비우고나서 dsp의 매니지먼트가 매우 부적절하고 미숙했고, 이것이 이번 계약 해지 소동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변호사측은 “능력 있는 전문적인 소속사를 찾고 있다”고 언급했다.


http://jpnews.kr/8368

  • 토토가 2 열풍으로 인해 재입덕한 팬들과 새로 입덕한 팬들이 점점 증가하고 있으며 네이버 검색창에 입덕만 쳐도 연관 검색어에 '은지원 입덕', '젝스키스 입덕', '젝키 입덕' 등이 나올 정도로 인기 몰이 중이다. 3.5집 수록곡 '커플'은 2016년 5월 6일 뮤직뱅크 케이 차트에 14위로 진입했으며 다음주인 5월 13일에는 3계단 상승한 11위에 올랐다. 또한 2016년 5월 보이그룹 브랜드 평판 빅데이터 분석 결과, 수많은 현역 아이돌들을 제치고 2위에 올랐다.
  • 무도 방영을 전후로 유튜브에 젝키가 출연한 90년대 예능 영상들이 올라왔다. 90년대 중후반에 태어나 젝키를 모르고 산 사람들은 90년대의 예능에 신기해 하고 있으며, 몇몇 신규 팬들은 덕질하려고 봤다가 화질 때문에 놀란다 카더라. 사실상 90년대 후반의 예능 프로그램에 다 나왔다고 해도 무방하다 지금도 유튭에 젝키 치면 다양한 젝키가 나온 예능들을 볼수 있다. 98년도 7월에 방영된 SBS 퍼니퍼니에서 홍진경 가방을 뒤지는 영상까지 있다(...).
  • 2016년 6월 24일 방송된 MBC FM4U ‘정오의 희망곡 김신영입니다’에 룰라 김지현 채리나가 출연했는데, 채리나는 룰라 시절 후배들을 때리고 다닌다는 소문이 났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고 사연을 밝혔다. 채리나는 혼낸 적은 없고 혼난 적은 있다며, 젝스키스 인사를 안 받아준다고 그쪽 대표님인 이호연 사장한테 혼났다고 말했다. 이어 채리나는 “그때 당시 저희가 선배인데 젝스키스가 인사를 건성으로 하더라. 그래서 받아주기 싫었다. 이후에는 친해져서 오해를 풀었다”며 이야기를 훈훈하게 마무리했다.
  • DSP에 1996년 입사후 20년 이상 근무 중인 장진희 이사는, 2012년도 인터뷰에서 입사 초기 모습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시기나 정황상으로 봤을 때 젝스키스의 이야기다.기사

장진희 본부장이 DSP미디어에 입사한 것은 1996년 가을. 지인의 소개로 이 회사 기획 파트에 입사해 사회 첫발을 내디뎠다. 가내수공업 수준을 면치 못했던 당시 연예계에서 기획이라는 근사한 단어는 이내 사라졌다. "일당백이 아니면 회사도 저도 버틸 수 없었어요"라는 당시 그에게 최근 분업화ㆍ산업화ㆍ세계화 등을 거듭하고 있는 최근 연예 기획사의 변화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변변한 숙소가 없던 시절 지방 출신 멤버들 밥을 차려주기 일수였고 컴퓨터가 없던 시절 팬 관리에 마케팅ㆍ정산까지 모두 수기하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스케줄 오갈 때 맞춰서 밥을 해놓으면 그렇게 잘 먹을 수가 없었죠. 저까지 허기를 느낄 정도였으니 말 다했죠. 쌀을 하도 많이 넣어서 밥통이 터진 적이 있을 정도였어요. 아무리 먹어도 배고프다고 아우성이었죠."

온라인 뱅킹이 도입되기 전이라 매일 은행에서 하루를 시작하기도 했다. 매일 가족처럼 사무실에서 마주치다 보니 멤버들은 누나처럼 그를 따랐고 연애상담부터 가족문제까지 시시콜콜하게 회사의 대소사는 그의 손을 거쳐야 했다.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어린 나이부터 가장 노릇을 해야 하는 멤버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면 마음이 숙연해지죠. 한번은 여자친구 선물 포장을 부탁하는 멤버도 있었어요. 워낙 가깝다고 생각한 모양이에요."

"젝키와 클릭비는 변변한 연습실도 없었어요. 연습생의 개념이 없던 시절이라 타고난 재능만 가지고 무대에 오른 경우죠. SS501 데뷔 때부터 오디션의 개념이 생겼어요. 통과한 친구를 전문 트레이너가 붙어 노래ㆍ춤ㆍ연기 같은 걸 훈련을 시켰죠."


http://sports.hankooki.com/lpage/music/201204/sp2012042007015895510.htm

  • 2000년 6월 16일 피자의 아침 방송내용을 보면, 소속사 측은 행사에 있어서는 멤버들에게 70%를 준다고 항변했는데, 젝스키스/정산 문제 문서를 보면 2015년 tvn 택시 방송에서 장수원이 행사 한번에 멤버당 300만원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이를 통해 당시 젝스키스의 1회 행사료를 계산해보면, 2570만원이다. 99년도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S.E.S.가 행사 1회당 1000만원을 받는다고 쓰고 있는데, 이보다 많은 액수다. 당시 대졸신입 월급 평균이 130만원 할때이니, 2570만원은 굉장히 큰 액수다. 오늘날로 치면 7000만원 가량의 가치다. 오늘날 아이돌 중 이 정도 액수를 받는 팀은 찾기 힘들다.
  • 모든 멤버가 데뷔 당시 예명을 쓰지 않은 1세대 남자 아이돌이다.

 


 

정규 앨범
집수 앨범명 활동곡 발매일
1 학원별곡 학원별곡 / 폼생폼사 / 연정 / 배신감 / 기억해줄래 1997년 5월 14일
2 WELCOME TO THE SECHSKIES LAND 기사도 / 탈출 / 말괄량이 길들이기 / 거절의 이유 1997년 11월 1일
3 Road Fighter Road Fighter / 무모한 사랑 / Crying Game 1998년 7월 15일
3.5 SechsKies Special 커플 / 너를 보내며 1998년 10월 30일
4 Com' Back Com' Back / 예감 / 그녀가 남기고 간 선물 / 그대로 멈춰 1999년 9월 9일
5 ANOTHER LIGHT 특별해, 웃어줘 / 느낌이와 / 네가 필요해 / 백허그 / 술끊자 / 현기증 / 다신 / 오랜만이에요 2017년 9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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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T. 프롤로그  (1) 2020.05.02

H.O.T. 프롤로그

2020. 5. 2.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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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H.O.T. 입니다. 키워주세요. "

 

그룹명 H.O.T
High-five OTeenagers
멤버 문희준
( 文熙俊 / 78 / 서울특별시 강남구 / B )


장우혁
( 張佑赫 / 78 / 경상북도 구미시 / O )


토니 안
( 안승호 [安勝浩] / 78 / 서울특별시 용산구 / O )


강타
( 안칠현 [安七炫] / 79 / 경상북도 예천군 / B )


이재원
( 李在元 / 80 / 서울특별시 강동구 / A )
데뷔 1996년 9월 7일
정규 앨범 [We Hate All Kinds of Violence]
활동기간 1996년 9월 7일 ~ 2001년 5월 13일
소속사 SM엔터테인먼트
공식색 하얀색
팬덤 Club H.O.T

 


 

개요

1996년 9월 7일에 SM엔터테인먼트 소속으로 데뷔한 대한민국의 5인조 보이그룹이다.

2001년 5월에 해체되었다가, 2018년 2월에 재결합했다.

데뷔하자마자 신드롬을 일으키면서 1990년대 후반 대한민국 대중가요계를 평정한 전설의 아이돌 그룹으로 중화권 시장까지 사로잡아 한류의 문을 연 그룹이다.

아이돌 그룹 최초로 연간 최다 음반 판매량 달성, 방송 3사 가요대상 그랜드 슬램 달성, 자작곡으로 대상 수상, 국내가수 최초로 잠실 주경기장 공연 매진, 역대 최대 팬클럽 등 전설적인 아이돌답게 수많은 기록을 남겼다.

1996년 9월 7일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에서 첫 데뷔하여 1집 타이틀곡인 학원폭력을 주제로 한 갱스터 랩 '전사의 후예'로 주목을 받았다.

1996년 10월 중순경부터 KBS 가요프로에서 10위권, MBC에서는 4위에 안착했으며 1996년 11월 17일 SBS TV가요20에서는 3위까지 치고 올라왔다.

이어서 후속곡인 '캔디'가 메가히트급으로 대박이 나면서 최정상의 인기를 거머쥐게 되었고, ‘행복’, ‘We are the Future’, ‘열맞춰’, ‘빛’, ‘아이야’ 등을 연이어 히트시키며 90년대 후반을 대표하는 아이돌 그룹으로 자리 잡았다.

 

2020년 현재는 다양한 컨셉의 아이돌 그룹들이 춘추전국시대를 이루고 있지만 1990년대 후반은 그냥 H.O.T.로 10대들이 단결할 수 있을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그나마 유일한 라이벌로 젝스키스가 활동했지만, 실질적인 인기는 H.O.T.의 적수가 될 수 없을 정도로 독보적이었다.

H.O.T.의 대성공으로 한국 대중가요계는 빠른 속도로 아이돌이 주도하는 가요계로 재편됐다.

당장 젝스키스부터가 ‘타도 H.O.T.'를 기반으로 등장한 그룹이다.

그외의 수많은 아이돌 그룹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대중음악을 다루는 프로그램엔 아이돌 그룹들이 거의 점령하게 되었다.

1990년대 후반 대중가요계의 판도를 바꾸는 변화의 시초격이라고 할 수 있는 아이돌 그룹이다.

1987년에 데뷔한 소방차가 한국 아이돌의 태동이었고 1992년에 데뷔한 서태지와 아이들이 대중문화와 가요계의 판도를 바꾼 K-POP의 시발점이라면, H.O.T.는 아이돌 그룹의 정의를 완성하며 본격적인 아이돌 시대를 연 그룹이다.

현재 거의 모든 아이돌 그룹들이 담당하고 있는 구성들인 메인 보컬(강타), 서브보컬(문희준, 토니 안), 래퍼(장우혁, 이재원) 등의 구성이나 성격적/캐릭터적 설정들인 만능 재주꾼 리더(문희준), 대표 비쥬얼(강타), 댄디한 귀공자(토니 안), 쿨한 카리스마(장우혁), 순수한 막내(이재원) 등 현재 아이돌 그룹의 멤버들에게 등장하는 기믹과 컨셉적 역할들을 최초로 완벽히 구현한 그룹이다.

실제로 2집의 수록곡인 Go! H.O.T.! 의 가사에서 멤버들의 이미지를 위트 가이 희준, 섹시 가이 강타, 무드 가이 토니, 와일드 가이 우혁, 샤이 가이 재원이라고 칭했으며 1집 캔디 때부터 멤버 각자에게 고유 번호와 고유 컬러를 부여했다.

 

H.O.T.의 아이돌 그룹의 구성은 나중에 거의 모든 아이돌 그룹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당장 H.O.T.가 데뷔하고 바로 데뷔한 젝스키스, NRG, 신화, god 등 다른 1세대 남성 아이돌 그룹들도 H.O.T.의 영향을 받았다.

 

특히나 당시 아이돌 업계에서 나름 선구자였던 DSP의 이호연 사장은 H.O.T.의 성공을 보고 급하게 듀엣에서 6인조 그룹으로 노선을 수정해 젝스키스를 데뷔시켰다.

 

평가

1990년대 후반만 해도 가요계에서 '아이돌'이란 단어조차 생소하였다. 당시에는 '아이돌'보다는 '고교생 그룹', '하이틴 스타', '10대들의 우상' 등으로 불렸다.

그중에서도 한국형 아이돌의 시초이자 얼굴격이었던 H.O.T.는 언론과 평론가들의 관심을 집중적으로 받았다. “10대들은 왜 이들에게 열광하는가”라는 제목으로 이들의 인기요인을 분석하는 칼럼이나 뉴스 보도도 등장하였다.

부정적인 평가로는, ‘기획사의 철저한 전략으로 만들어진 상품이다’, ‘10대 청소년들이 상업적으로 이용되는 것이 아닌가 염려가 된다’, '외양에 치중되어 있다', ‘기획사에서 만들어주는 음악을 한다.’등이 주요 비판 내용이었다.

한 방송사에서는 학업에 충실해야할 학생들이 돈벌이에 이용돼서는 안된다며 고교생 가수의 출연을 금지한다는 방침을 발표해 논란을 빚기도 했다.기사그랬던 방송사가 이제는 ‘더유닛’이라는 아이돌 육성 프로그램을 만들었으니 세상 참 많이 변했다

H.O.T.의 대성공으로 아이돌 그룹들이 가요계를 장악하게 되자 성인층 가수들의 설 자리가 없다는 비판도 많았다.

하지만, 성인층 가수들이 설 자리가 없어진 실질적인 이유는 H.O.T.가 데뷔하기 이전부터 서태지와 아이들의 데뷔 이후에 한국 대중가요계의 판도가 변했기 때문이다.

긍정적인 분석도 있었다. 라디오 음악PD들이 집필한 <에쵸티 즐거운 반항>이란 책에서는 이들의 인기요인을 ‘차별화와 일체화’ (각기 개성이 뚜렷한 멤버구성으로 ‘다름’을 내세우면서도 집단 유행에 뒤쳐지지 않는 10대들의 특성을 충족), ‘재빠른 변신’ (곡마다 달라지는 빠른 컨셉 변화로 급변하는 젊은이들의 취향에 기민하게 대응), ‘착한 이미지’(H.O.T.에 열광하는 자녀들을 걱정하는 부모들을 안심시키고 좋아해도 무해하다고 허락하게끔 만든 모범생 이미지)라고 분석하였고 이전까지 이런 지위를 누린 가수는 없었다고 평하였다.

데뷔 초반에 들었던 여러 비판들이 채찍질이 되었던 것인지 H.O.T.는 해마다 성장해갔다.

안무는 처음부터 문희준 장우혁이 거의 다 만들었고, 랩과 가창력도 앨범을 낼 때 마다 발전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 멤버들은 데뷔 초부터 스스로 작곡 공부를 하였고 3집부터 멤버 전원이 앨범에 자작곡을 싣기 시작했는데 작사, 작곡에 더불어 편곡까지 직접 하면서 음악에 더욱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5집에 이르러서는 앨범의 전곡을 멤버들의 자작곡으로 채우고 올 프로듀싱을 하였는데, 이는 아이돌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타이틀곡이나 후속곡도 자작곡으로 활동하였다.

 

영향과 파급 효과

당시 영세 기획사였던 SM엔터테인먼트를 한국 최고의 기획사로 키워낸 그룹으로, 서태지와 아이들의 혜성같은 등장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10대 팬덤을 타켓으로한 기획형 아이돌의 시작이다. 이때부터 대형기획사가 철저하게 사전분석하고 조립한 아이돌의 댄스뮤직이 대중문화를 석권하고 한류의 시작이 된다.

이 때 중화권에서의 인기도 엄청나서, 1998년 한국가수 최초로 중국에서 음반발매를 하였으며 한류현상의 시초가 된다. 2000년초에는 중국에서 한국가수 최초로 베이징단독콘서트를 개최하였고 중국언론에선 한류가 몰아치고 있다고 보도했다. 관련기사 인기의 영향으로 중국에서 한국상품들이 특수를 누리기도 했다.기사 2000년말에는 중국에서 농심의 광고모델을 하였으며영상 '당대가단'이라는 중국음악잡지에서 해외인기가수 순위 1위를 장기간 유지할 정도로 인기가 상당했다.기사 중국 언론과 매체에서는 한국은 김치와 H.O.T.의 나라라고 소개하기도 하였으며 당시 중국의 H.O.T. 팬 수가 800만명이었다는 설이 있을 정도였다.

따로 활동하지 않던 일본이나 북미와 유럽권에서도 매니아층이 있었으며, 미국 MTV VMA에서는 1999년에 'international viewer's choice'라는 부문에서 H.O.T.의 '열맞춰' MV가 수상하였다. 관련기사

해체 후에도 jtL이나 솔로 활동으로 중화권을 비롯해 인도, 싱가폴, 베트남 등 아시아 전역에서 인기를 누리며 오늘날 글로벌한 KPOP 인기의 기반을 닦게된다. 

 

<시사저널>에서 발표한 문화 • 스포츠인 영향력 순위에서 1999년 2000년에 연달아 순위에 들었으며, 특히 1999년은 배우, 가수를 통틀어 연예인 중에서는 가장 높은 순위를 차지하였고 아이돌 그룹 최초로 문화 • 연예인 부문 1위를 차지했다.

음반판매량은 1집 100만장으로 시작해서 2집이 150만장, 3집이 110만장에 4집 138만장, 5집 88만장으로 네 개의 밀리언셀러 앨범 기록을 세웠다.

“돌멩이에 H.O.T.이름만 새겨도 팔린다.”는 말이 생길정도로 H.O.T.관련 상품들이 불티나게 팔렸다. 1집 캔디 무대에서 착용했던 장갑, 가방, 모자, 먼지인형집게 등을 착용한 학생들을 길거리에서 쉽게 볼 수 있었다. 그외에도 H.O.T. 사진이 들어간 공책, 지우개, 편지지, 저금통 등 온갖 학용품과 팬시상품들이 팔렸다. 

1999년에는 H.O.T.자서전도 출간되었다. 출간 열흘만에 20만권이 팔려 역사상 최단 기록으로 베스트셀러 1위를 달성하며 화제가 되었다. 

한불 화장품과 손을 잡고 H.O.T. 향수도 발매하였는데 출시 이틀만에 10만개가 매진되었다. 이 무렵엔 DNA 목걸이도 판매되었다.

H.O.T. 캐릭터를 그려넣은 ‘틱톡에쵸티’라는 음료수도 발매되었다. 출시 5개월만에 4500만캔이 팔려 폭발적인 판매량으로 당시 음료업계 1위였던 코카콜라의 판매량을 앞질렀다. H.O.T.세대라면 소풍 날 이 음료수를 마셔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2000년엔 H.O.T.를 모델로 기용한 르까프 나이키를 누르고 동종 업계 1위에 오르는 이변을 일으켜 주목을 받기도 했다.

 

나이키는 국내 진출 후 5년이 넘게 1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국내 토종 브랜드 르까프가 H.O.T.를 모델로 기용한 후 5개월만에 이를 따라잡고 1위에 오르는 기록을 만들어낸 것이다. 르까프 측은 당연히 계약 연장을 원했으나 이후 H.O.T.가 바로 해체를 해 재계약을 할 수 없었다.

2000년엔 '평화의 시대'라는 한일합작 3D입체 영화에도 출연했는데 흑역사 흥행 실적 약 2만4천이라는 성과로 묻혔다. 보다 보면 정말 열심히 연기하는 멤버들이 불쌍할 지경. 아이러니하게도 멤버들이 프로듀싱한 평화의 시대의 OST 음반은 30만장이 팔렸다고 한다.

 

1998년, IMF외환위기에 해외관광객 유치를 위한 국가홍보CF에 대중음악 보이그룹으로는 유일하게 출연하였다. 해당영상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97년 대선후보 시절에도 좋아하는 가수로 H.O.T.를 꼽았고기사참조, 1998년 10월에는 H.O.T.를 청와대에 초청하여 오찬을 함께하였다. 오찬 소감 영상(30초 부터)

그 외에도 당시 해외가수에게만 대관되던 잠실주경기장에서 최초로 단독콘서트를 한 국내가수이며 콘서트를 이유로 지하철 막차 시간을 바꾸고 교육청에서 조퇴금지령을 내린 가수였다. 그리고 조용필 다음으로 많은 잠실주경기장 단독콘서트를 한 가수이기도 하다.

2018년 10월 13일~14일에 행해진 재결합 콘서트의 영향으로 명절보다 더 많은 인원이 기차를 이용하여 SRT이용객 수 최고치를 경신하였다. 기사참조

 

수상 경력

최전성기의 시작이었던 1997년도에는 아이돌 그룹으로서는 최초로 음반판매량 1위를 기록해 골든디스크 시상식 대상을 수상했으며 그에 더해 MBC 한국가요제전, SBS 가요대전, 서울가요대상, KMTV 가요대전 대상을 수상하였다.

최전성기의 정점이었던 1998년도에는 당시 방송 3사 모든 연말 가요프로에서 대상을 수상하여 아이돌 그룹으로서는 사상 최초로 그랜드슬램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그에 더해 서울가요대상에서도 젝스키스와 함께 공동으로 대상을 수상하였다.

 

재결합

2014년 11월 무한도전 토토가에서 H.O.T.의 섭외를 위해 강타가 출연했는데, 강타는 H.O.T.의 재결합을 조심스럽게 보고 있는 시각이 비춰졌고 결국 토토가 출연은 불발되었다.

하지만 토토가 본편에서 무한도전 멤버들이 H.O.T. 코스프레를 하였고 이후 토토가에 출연했으면 싶은 가수 설문조사에서 H.O.T.가 1위로 뽑히기도 하였다.

꾸준히 제기되던 재결합설이 2016년 데뷔 20주년을 맞아 구체적으로 언급된 바 있다.

특히 2016년 4월, 당시 라이벌이었던 젝스키스가 무한도전 토토가2 - 젝스키스를 통해 재결합을 공식화함에 따라 H.O.T. 재결합에 대한 관심과 기대도 증가하게 된다.

또한 토토가2 - 젝스키스 말미에 유재석과 하하가 토토가 3를 예고했던 장면을 통해 사실상의 최유력 후보로도 거론되었던 상황이었고, 멤버들과 이수만 프로듀서가 비밀리에 회동을 가졌다는 기사를 통해 더욱 기대감을 증폭시켰다.

이후 재결합에 관한 구체적인 논의는 거의 90%까지 진행되었으나 최종적인 협의 과정에서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는 것이 내부 측의 주장.

이로 인해 그동안 소문만 무성하게 나돌았던 20주년 프로젝트는 오랜 설왕설래 끝에 무산되고 만다.

이후 라디오 스타 젝스키스 편에서 김구라가 H.O.T. 재결합 무산의 원인이 어느 한 명에게 있다는 찌라시를 폭로한 이후 대다수는 여러 정황상 장우혁일 것이라 추측하기도 했으나 장우혁은 방송을 통해 수차레에 걸쳐 의혹을 일축한 바 있다.

15년 동안 빈번하게 논의와 무산을 거듭해온 재결합설과 문희준의 결혼에서 비롯된 일련의 사건으로 인한 팬덤 내 갈등이 팽배했던 가운데 2018년 1월 23일, 무한도전의 토요일 토요일은 가수다 시즌 3 기획 차 멤버 전원이 회동을 열었다는 공식입장을 발표하였고 6일 뒤, 마침내 토토가3 - H.O.T.의 방송이 확정되었다.

그리고 토토가에서 말했던 팀원들과의 상의 끝에 17년만의 재결합 콘서트가 확정되었다.

해당 콘서트의 정식 명칭은 FOREVER HIGH-FIVE OF TEENAGERS이다.

본래는 팀 이름을 따서 그대로 FOREVER H.O.T.로 정해졌으나 현재 상표권 문제로 자신들의 영어 약자를 풀어서 표기했다.

다만 해당 표기도 팀명의 상표권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 콘서트 명칭이 바뀌자마자 이 풀어서 표기한 명칭에 대해서도 상표권 출원을 시도하면서 향후 팀명과 관련한 상표권 분쟁이 발발할 가능성이 커지게 되었다.

2018년 10월 13일과 10월 14일, 무한도전 토토가에 이어, 양일간 잠실 주경기장에서 콘서트를 개최했다.

그리고 2019년 9월 20일 ~ 22일 3일간 고척돔에서 단독 콘서트가 개최되었다.

작년 2018년 콘서트의 #NEXT_MESSAGE2019 떡밥은 이 콘서트였던 것.

해당 콘서트까지가 공연 기획사와 계약한 회차였다고 하므로 2020년에도 이들을 볼 수 있을지 주목된다.

다만 2018년 콘서트에 이어 2019년 콘서트에서도 계속해서 기존 앨범 수록곡과 솔로 신곡으로 콘서트를 진행하였는데, 멤버들도 향후를 생각하면 당연히 그룹 신곡을 내야 한다는 대전제에 대해 공감하고 있으나 여러 가지 사정상 신곡을 내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2019년 콘서트에서는 기존에 단체 안무를 단 한 번도 공개한 적 없는 Do or Die의 안무를 신규 레퍼토리로 선보여 팬들의 아쉬운 마음을 대신했다.

하지만 아직 무대를 보지 못한 그룹 수록곡들과 솔로곡들도 매우 많고 그저 콘서트만 해줘도 감지덕지라는 팬들도 많다.

 

2019년 콘서트 이후로는 개인활동 위주로 활동하고 있다. 2020년 11월 MBC 예능 <안싸우면 다행이야>에 문희준과 토니 안이 함께 출연하였다. 2021년 1월 1일 토니 안의 인스타그램 라이브에서 콘서트를 해달라는 팬들의 요청에 '나도 콘서트 진짜 하고 싶다. 우리 멤버들도 다 하고싶어하는데...'라고 응답했다. 2021년 3월 7일 SBS전설의 무대 아카이브K에 강타, 이재원을 제외한 나머지 멤버들이 출연하였다.

 


 

정규 앨범
집수 앨범명 활동곡 발매일
1 We Hate All Kinds of Violence 전사의 후예 / 캔디 1996년 9월 7일
2 Wolf and Sheep 늑대와 양 / 행복 / We Are The Future 19977월 5일
3 Resurrection 열맞춰 / 빛 19989월 25일
4 I Yah! 아이야! / 투지 / 환희 19999월 15일
5 Outside Castle Outside Castle / 그래! 그렇게 200010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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젝스키스 프롤로그  (2) 2020.05.02

터보 프롤로그

2020. 5. 1.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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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명 Turbo
터보
멤버 김정남
( 金正男 / 72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북아현동 / - )


김종국
( 金鍾國 / 76 /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 A )


마이키
( 조명익 [趙明翼] / 80 / 서울특별시 동작구 / - )
데뷔 1995년 7월 1일
정규 앨범 [280km Speed]
활동기간 1995년 7월 1일 ~ 2001년 4월 9일

2015년 12월 2일 ~ 2016년 1월 3일현재
소속사 스타뮤직 (1995년 ~ 2001년)

더 터보 컴퍼니 (2015년 ~ 현재)
공식색 펄 에메랄드 그린
팬덤 Tur-F (터프)

 


 

1995년 7월 1일에 데뷔한 대한민국의 3인조 보이그룹이다.

1995년 데뷔 결성 당시에는 1기 멤버 김정남과 김종국으로 이루어진 2인조 그룹이였으나, 1996년 2집까지 활동을 하였다.

1997년 3집부터 2기 멤버로 김종국과 마이키(본명 조명익)로 이루어졌으나 2001년에 해체를 하였다.

2015년 재결합을 한 뒤 정규 6집부터 김정남, 김종국, 마이키의 3인조로 재결합을 하였다.

 

1기

SBS 전설의 무대 아카이브K 에 출연한 김정남이 회고 하길 문나이트출신의 춤꾼으로 활동하던 90년대 초반 가수 데뷔를 준비하며 나이트클럽 DJ를 지내던 시절, 친하던 단골 고객에게 노래 잘하는 사람이 없냐고 수소문했고, 그 단골이 안양에 노래 잘하는 사촌 동생이 있는데 만나 보라고 권유해 당시 고등학생이던 김종국을 만나게 됐다고 한다.

검은 차이나 교복에 올백머리를 한 매서운 눈을 가진 김종국과 첫 만난 김정남은 위압감을 느꼈지만 오디션 겸 해서 노래와 춤은 좀 할줄 아느냐고 했고, 김종국이 특유의 가창력으로 스틸하트의 'shes gone'을 불렀는데 가창력에 놀란 김정남이 당장 소속사 대표에게 전화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춤. 학교 댄스동아리 출신이라는 김종국의 소개에 기본은 하겠지 했던 김정남이 노래를 받고 한달 뒤 데뷔를 목표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막상 연습에 들어가니 김종국이 기본적인 스텝도 못 밟는것을 보고 좌절했다고 한다.

하지만 가수 데뷔 열망이 컸던 김종국이 뼈를 깎는 노력으로 무던히 춤 연습을 했고 하루만에 전체 안무의 3/1 정도를 해내는걸 본 김정남이 감동하여 결국 터보로 1995년 데뷔하게 된다.

1995년 1집의 타이틀 곡인 "나 어릴적 꿈"' 과 후속곡인 "검은 고양이", "선택" 등을 모두 히트시키면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그리고 2집 타이틀곡인 "트위스트 킹", "Love is...", "어느 째즈바" 도 대박을 치면서 최고의 댄스 그룹으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계속되는 소속사의 노예계약과 무리한 스케줄 등으로 인한 혹사로 힘들어하던 중 김정남과 김종국이 아는 소속사가 있어서 그 쪽으로 소속사를 옮기려다가 사기를 당해 잠적했고, 두 멤버가 잠적한 뒤 소속사의 만행이 드러나자 검찰과 경찰이 소속사를 조사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얼마 못 가 김종국은 소속사로 돌아왔지만 다른 멤버인 김정남은 복귀를 거부하면서 시간을 끌다가 이듬해에 결국 터보를 탈퇴했다.

나중에 김정남이 밝히길 1기 멤버가 1명 더 있었다고 한다. 그 멤버는 인디고 곽승남이며, 포지션은 메인보컬이었다. # 하도 소속사가 조폭같은 탓에 데뷔 직전에 탈퇴도망했다고 한다.

그래서 서브보컬이던 김종국이 리드보컬로 자리를 옮겨서 그대로 댄스 듀오로 데뷔했다고. 물론 더 형인 김정남이 당시에도 리더인 건 변함이 없었다고 한다.

 

2기

그 후, 김정남이 탈퇴하고 소속사 오디션 끝에 마이키를 영입해 1997년 2기 터보를 구성하여 오랜 공백 끝에 3집으로 컴백하게 된다.

2기도 "Goodbye Yesterday", "회상", "금지된 장난", "애인이 생겼어요", "X", "White love" 등의 히트곡들을 연달아 내며 다시금 최고의 댄스 그룹으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White love"라는 노래는 2000년대 현재까지도 크리스마스 때면 어김없이 틀어주는 노래들 중 한 곡이다.

또한 리메이크도 많이 되었는데, 대표적인 그룹이 코요태. 아직까지 유명 가수가 만든 노래 중에 이 노래만큼 크리스마스에 어울리는 음악이 없는 모양이다.

1998년 말 한중일 콘서트 때 공연 자세가 불성실하다며 김종국에게 내려진 가수 활동 무기한 정지 처분 등의 사태로 인해 쇠퇴기를 걷게 된다.

이 일의 전후사정에 대하여 김종국이 솔로데뷔 이후 언급한 인터뷰가 있다.

1999년 가을 징계가 풀려서 2000년 초에 5집 앨범으로 컴백했지만 타이틀 곡 'Cyber lover', 'Tonight'이 전보다는 못한 평가를 받고 활동을 마감했다.

이후 계약 문제로 2001년 마지막 앨범 "History" 를 끝으로 김종국이 터보를 탈퇴하고 그룹은 사실상 해체 수순에 들어간다.

 

해체 이후

2001년 'History' 앨범 활동 이후 마이키는 터보에 홀로 남아 새 멤버를 선발하여 3인조 혹은 혼성 그룹으로 변모를 시도할 거라는 계획을 내비치기도 했으나 결국 무산되고 이후 암흑기를 보내다가 2005년 김종국과의 디지털 싱글로 다시 얼굴을 내보이며 동시에 새로운 혼성 그룹 M3를 만들어 활동을 재개했지만 망했다. 2011년 역시 싱글도 역시... 마이키는 이후 미국에 건너가서 보험설계사와 옷가게 등 여러 곳에서 일하고 있었다. 여담으로 이단옆차기의 마이키랑은 전혀 다르다! 혼동이 없기를 바란다.

김정남 역시 연예계에 미련을 버리지 못해서 1999년에 스냅이라는 5인조 댄스 그룹 결성 후 활동했지만 불의의 사고로 해체되어 연예계를 접었다가, 6년 후인 2005년에 솔로로 다시 컴백하며 활동했지만 망했다. 현재는 과거에 최고의 춤꾼으로 불리던 실력을 살려 댄스학원을 경영하여 후배 댄서들 양성에 주력하고 있다.

이전 멤버들이 각자 자기 갈길을 가고 있던 상황에서 무한도전에서 토토가 특집이 진행되었고, 이를 계기로 새로운 역사가 만들어진다.

 

무한도전 토토가 특집

그렇게 추억 속으로 묻히는가 했는데, 무한도전 토토가 특집에서 18년 만에 1기 완전체로 다시 무대에 섰다! 본래는 김종국 섭외 장면만 나와 김종국만 나오는 듯 했으나 그 녀석 때문에 김종국 섭외분을 다시 찍어야 하는 상황이 왔는데, 그 사이에 김종국이 김정남과 연락이 되었고 김정남이 출연을 결정하면서 1기 멤버가 다시 무대에 서게 되었다. 그동안 김정남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토토가 문서 참조. 김종국 뺨치는 예능감을 보여주며 실시간 검색어 랭킹에도 오르는 등 상당히 화제가 되었다.

그리고 2014년 12월 27일, 본 무대 촬영 분에서 드디어 그들의 무대가 나왔다. 그들이 부른 노래는 '나 어릴적 꿈', 'Love is...(3+3=0)', 'White Love(스키장에서)'. 특히, 'White Love(스키장에서)'의 경우, 크리스마스 앨범으로 내긴 했으나, 김정남과 김종국이 무대에서 부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드디어 두 사람이 이 노래를 부르는 무대가 실현된 것이다. 박명수, 정준하 고마워요 물론, 김종국의 10주년 기념 스페셜 앨범에 있는 2005 White Love (스키장에서) 버전을 썼다. 이것도 마이키가 부르긴 했으나, 마이키 버전을 지우고, 김정남이 대신 불렀다.

그들이 토토가의 첫 무대였는데, 시작부터 공연장을 매우 뜨겁게 달구었다. 김정남은 오랜만에 무대에 서는 관계로 '나 어릴적 꿈' 끝부터 체력이 딸리는 모습을 보여 세월의 야속함을 느끼는 듯 했으나 관중들의 뜨거운 반응에 체력을 극복한 열정으로 상당히 좋은 무대를 보여줬다. 물론 김종국도 변함없는 가창력으로 무대 퀄리티를 상승시켜주었으며 엔딩 곡 '트위스트 킹' 으로 토토가의 시작과 끝을 장식했다. 무대가 끝난 뒤 정말 재밌었다는 말로 무대 소감을 밝혔으며 그 와중에 김정남은 벌써부터 2탄을 생각하고 또 재결합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말했다. 안 본 사이 예능왕 다 됐다

이 일로 인해 2015년 1월에 뜬금없이 '터보 - Reboot: The Best' 라는 이름으로 베스트 음반이 하나 나왔다. 2CD 구성이며 리마스터링 및 5곡의 보너스 트랙이 수록되어 있다. 이에 김종국은 팬카페에 "이번 앨범은 저는 물론 정남이 형 그리고 마이키 어느 누구와도 아무런 관련이 없고 예전처럼 저나 회사의 동의 없이 기존 음원을 리마스터링해서 제작한 앨범입니다." 라며 자신들의 의지로 발매된 앨범이 아님을 강조해 토토가 열풍을 돈벌이에 이용하려는 사람들에 대한 주의를 당부했다.

또한 2015년 1월 25일 방송된 SBS 인기가요에서도 토토가로 시작된 90년대 복고 열풍에 힘입어 터보가 출연했는데 이번엔 김정남이 아닌 마이키와 함께 등장했다! 사실은 사전녹화된 분량인 김종국과 마이키의 무대만 전파를 탔지만 생방송 현장 무대에서는 김정남을 포함한 3명이 모두 등장했다고. 덧붙여 방송이 끝난 후에 어느 카페에서 이 3명이 함께 팬미팅도 가졌다고 한다.

그리고 컴백을 몇 시간 앞둔 2015년 12월 20일 오후, 런닝맨 X맨 특집에서 김정남이 원조 X맨 멤버들과 함께 출연했는데 본인은 김종국과 함께 팀을 이루었고, 원조 댄싱머신 풀가동을 시전했다! 그리고 동시에 비아이와 함께 콜라보레이션 댄스를 선보이기도 했다. 여담으로, 본인이 "예전엔 2인조였는데 지금은 3인조라 분량이 줄었다."며 폭소를 자아냈으니 말 다했다.

 

재결성: 3기 - 터보 완전체

예전의 터보는 우리의 터보가 아니었다. 그래서 우리가 만드는 터보를 만들고 싶었다. - 김종국


2015년 12월 2일 김종국이 자신의 공식 팬카페에 직접 글을 올려 터보의 정식 재결합과 정규 6집 발표 소식을 알렸다. 그것도 김정남과 마이키가 모두 포함된 3인조 구성이다! 한 마디로 한국 가요계에서 볼 수 없는 진정한 그레이트 합체를 실현했다. 이게 왜 한국 가요계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경우냐 하면 이전 몇몇 그룹들도 해체 후 재결성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지만 한두명이 빠진 상태로 재결성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원조 멤버와 나중에 교체 투입된 멤버까지 모두 참여하여 그룹을 재결성한 경우는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자신들만의 프로젝트 기획사 '더 터보 컴퍼니'를 세워 음반을 제작한 후 컴백했으며 음반의 온라인 배급은 벅스가, 오프라인 CD매체 발매는 유니버설 뮤직이 담당했다. 터보 6집은 2015년 12월 21일 00시에 발매되었다. 원점회귀를 넘어선 레알 궁극체 참여진들은 이단옆차기, 주영훈, 윤일상, 유재석, 박정현, 제시, 케이윌, 이상민, 이하늘, 라이머, 산이, 지누, 소야, Jake K 등등. 엄청나다

앨범 공개 직후 타이틀곡 '다시'가 8개 음원차트 1위를 점령했고, 다른 수록곡들도 줄세우기나 100위권 안에 드는 등 전성기 못지 않은... 아니. 전성기때보다 더한 화력을 보였다. 터보 다시, 음원 사이트 점령…"차트 줄세우기 시작" 화력 인증 괜히 그레이트 합체가 아니다! 그리고 CD음반의 경우에도 초도물량을 모두 완판시키는 기염을 토했다. 그리고 1월 3일 SBS 인기가요에서 1위후보였던 YGiKON 싸이 사이에서 당당히 1위를 차지했다.

 

여담
  • 이쪽도  못지않게 가사를 뜯어보면 상황이 특이한데 '나 어릴 적 꿈' 은 꿈을 키워온 남자가 한 여자를 보고 을 버리고 나만의 여자로 만들어야겠다는 다짐을 나타낸다. 'love is'는 짝사랑을 고백했다 거부당했고, 그 여자가 자기 친구에게 갔는데도 계속 볼 수 있으니 좋다는 내용이고 'X' 는 좋아하는 여자에게 직접 다가갈 용기가 없어서 여자의 친구를 이용했다는 이야기. 'goodbye yesterday'는 알고 지내던 여자아이가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걸 보고 뒤늦게 자신의 감정을 깨닫는 이야기로 4곡을 엮어보면 남녀간의 사랑 스토리로 만들어질 수 있다.
  • "Love is..." 제목 괄호에 3+3=0이라는 것은 가사를 보면 여자를 안 지 6년이 되었는데 처음 안 3년만에 고백했다 차여서 군대를 갔다 오고 어찌저찌하다 보낸 시간이 또 3년인데 완전히 포기해야 되는 상황이라서 0이라는 뜻인 듯하다. 나 어릴적 꿈>X>Love is...(3+3=0) 등으로 순서가 생기는 등, 여러가지 바리에이션까지 존재했을 정도.
  • 자그마치 윌 스미스와 협연한 적이 있다. 그의 히트곡 'Just The Two Of Us' 싱글의 Korean Ver. 의 보컬 부분 피처링을 터보가 맡은 것. 영상이 아직까지 남아있다. 98년 6월 윌 스미스가 김종국 목소리가 독특하다며 터보를 초청했다고 한다. 영상
  • 터보 그룹명이 터보인 이유는 당시 터보 프로듀서의 자동차가 스쿠프 터보였다고....

 


 

정규 앨범
집수 앨범명 타이틀곡 발매일
1 280km/h Speed 나 어릴 적 꿈
검은 고양이
1995년 7월 1일
2 New Sensation Love is... (3+3=0)
Twist King
1996년 8월 14일
3 Born Again 회상 (December)
Goodbye Yesterday
1997년 10월 22일
4 Perfect Love 애인이 생겼어요 (True Love)
White Love (스키장에서)
1998년 11월 1일
5 E-Mail My Heart Cyber Lover 2000년 1월 26일
6 AGAIN (다시) 다시 (Feat. 유재석)
숨바꼭질
2015년 12월 21일

 

미니 앨범
집수 앨범명 타이틀곡 발매일
1 TURBO SPLASH 뜨거운 설탕 (Hot Sugar) 2017년 7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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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 DOC 프롤로그  (0) 2020.05.01

DJ DOC 프롤로그

2020. 5. 1.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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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명 DJ DOC
디제이 디오씨
멤버 이하늘
( 이근배 [李勤培] / 71 / 대구광역시 중구 삼덕동 / O )


정재용
( 鄭在容 / 73 / 강원도 속초시 / A )


김창열
( 金昌烈 / 74 / 서울특별시 강서구 / AB )
데뷔 1994년 11월 1일
정규 앨범 [슈퍼맨의 비애]
활동기간 1994년 11월 1일 ~ 2010년 8월 19일
(공식적인 해체 X)
소속사 부다사운드
팬덤 -

 


 

개요

1994년 이후 꾸준히 활동 중인 한국의 3인조 힙합 그룹.

초창기에는 댄스 그룹으로 시작했으나, 현재는 명실공히 그 성향이 바뀌었다.

뛰어난 곡들과 실력만큼이나 멤버들의 양아치 성향으로도 유명한 그룹.

 

한때 농담삼아 떠돌던 말이 "한국에서 제대로 된 갱스터 힙합하는 그룹은 DJ DOC가 유일하다."라고 했을 정도.

그들의 거친 이미지때문에 오래 남지 못한 가장 아까운 이미지는 20세기말에 가장 진보성향인 음악을 했다는 것.

 

동성동본 결혼, 직장 내 비정장(청바지) 착용, 노년세대의 자기표현, 교복의 정형화 문제 등 한국사회 내 고정관념들을 정면공격하였고, 그런 당대 가장 민감하던 소재를 진보적이고 유쾌한 가사와 신나는 리듬으로 풀어내는 곡들을 만들어 히트시켰던 상당한 뮤지션이다.

그들이 그런 곡들을 발표하고 나서 오래지 않아 수년 뒤 그런 일들이 한국에서 모두 현실화되었기에 더욱 놀라운 부분.

그들이 그곡들을 발표할때만해도, 각 소재들에 대해 기성세대 뿐만 아니라 청년세대들조차 고정관념을 가지고 "그건 좀 그렇지 않냐"는 반응을 보이던 현실이었다.

멤버는 이하늘, 김창렬, 정재용으로 세 명 모두 DJ 출신, 폭력전과자이며 고등학교를 중퇴했고, 가정사가 좀 좋지 않다.

이하늘은 부모님이 이혼하면서 버림받아 할머니 슬하에서 자랐고, 김창열은 아버지가 1998년, 어머니가 2000년에 차례차례 타계했으며, 정재용은 늦둥이 외아들로 14년간 아버지 병간호를 했으나 돌아가셨다.

하지만 정재용, 이하늘의 경우 당시 업소 쪽에서는 최상급으로 평가받던 DJ 겸 댄서였고, 전세대 댄서로 유명한 이주노, 박철우 등에게 미묘한 컴플렉스와 우월감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는데 "그 형들은 춤만 추지만, 우리는 노래도 한다."라는 식이었다.

원래 1집 때는 이하늘, 김창렬, 박정환 라인업이었다가 박정환이 1집 활동 이후 탈퇴했고, 2집부터 빈 자리를 메꾸기 위해 정재용을 영입하여 현재까지 체제를 유지 중이다. 참고로 정재용과 김창렬은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였다.

김창렬은 보컬, 이하늘, 정재용은 랩을 맡고 있으며, 5집 이후로는 세 멤버가 고루 돌아가면서 프로듀싱도 맡고 있다.

원래 DOC의 의미는 Dreams of Children이지만 당연히 현재의 모습과 심히 안 어울리고 기획사 소속일 때 붙은 억지 네이밍이다 보니 독립을 한 이후부터는 잘 언급하지 않는다.

데뷔초에는 'DOC'를 '덕'이라고 읽었다가 박정환이 탈퇴한 2집때부터 DOC를 '디오씨'로 읽기 시작했고, '디제이 덕'과 '디제이 디오씨'를 병용하다가 4집의 '디오씨와 춤을'부터 디오씨라고만 발음하고 있다.

초창기 음악을 들으면 "디제이~ 덕!"이라고 음악에서 본인들이 분명히 외치고 있고 언론에도 그렇게 보도되었다.

왕년 주먹다짐으로 파출소 신세를 많이 지던 시절에 "가수 디제이 덕 맞죠?"라고 물어보는 순경의 질문에 "덕 아니고 디오씨거든요, 디 쩜 오 쩜 씨!"라고 대답했다는 일화도 있다.

단, 언론보도는 98년도까지 계속 '디제이 덕'으로도 나갔다.물론, 이게 편해서 아직도 '디제이 덕'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있다.

2010년대 중반으로 치면 EXID를 불러달라는 대로 '이엑스아이디'로 안 부르고 '엑시드'라고 부르는 식이긴 한데, DJ DOC는 초창기부터 본인들이 디제이 덕이라고 불렀다가 바뀌었으니 경우가 다르긴 하다.

 

2010년대 중반까지는 김창열만 유일한 유부남이었으나, 2018년에 이하늘과 정재용도 50줄이 다 된 상태에서 차례차례 결혼들을 하면서 DJ DOC 멤버들은 전원이 유부남이 되었다... 에서 2020년 2월 24일 자로 이하늘이 이혼을 하였다.

 

2019년 11월 9일, 세종대학교 대양홀에서 열린 코요테 20주년 콘서트에서 스페셜 게스트로 등장하여 세 곡을 불렀다(Run to you, 나 이런 사람이야, DOC와 춤을).

 


 

앨범 목록
집수 앨범명 타이틀곡 발매일
1 슈퍼맨의 비애 슈퍼맨의 비애 1994년 11월 1일
2 DJ.DOC 2 머피의 법칙 1995년 5월 19일
3 D際2德 겨울 이야기 1996년 1월 1일
4 DJ DOC 4th Album DOC와 춤을 1997년 4월 1일
5 The Life... DOC Blues 5% Run to You 2000년 5월 16일
6 Sex and Love, Happiness I wanna 2004년 11월 9
7 풍류 나 이런 사람이야 2010년 7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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